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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책]‘한나 아렌트가 들려주는 전체주의 이야기’

입력 | 2006-01-21 03:09:00

학급회의에서 반장 승진이는 가난한 친구들도 있으니 각자 성의껏 학급비를 내자고 한다. 그렇지만 일괄적으로 돈을 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다.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할 수 있는지, 집단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철학이 이런 예화들을 통해 설명된다. 그림 제공 자음과모음


◇한나 아렌트가 들려주는 전체주의 이야기/김선욱 지음/212쪽·9700원·자음과모음(중학생 이상)

《유대인 출신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를 피해 고향을 떠나야 했다. 누구보다 집단의 횡포에 민감했던 터다. 그는 전체주의 연구에 몰두해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등 명저를 남겼다. 올해는 아렌트 탄생 100주년이다. 난해하게만 여겨지는 아렌트의 철학을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한 책이 나왔다. ‘한나 아렌트가 들려주는 전체주의 이야기’는 청소년이 이해하기 쉽도록 동화를 통해 아렌트의 철학을 설명한다. 저자는 아렌트 철학을 꾸준히 탐구해 온 김선욱(철학) 숭실대 교수다.》

호곤이는 자기가 반장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왕따 승진이에게 반장을 맡겼다. 호곤이만 화가 나는 게 아니다. 반 아이들 대부분이 불만이다. 어느 날 환경 미화를 주제로 학급회의가 열렸다. 환경 미화를 위해 1인당 액수를 정해 학급비를 걷자는 게 아이들의 생각. 그렇지만 승진이는 저마다 집안 형편도 있으니 학급비 상자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만큼 성의껏 내자고 한다. 가뜩이나 승진이가 마음에 안 들던 터에 승진이가 아이들의 의견에 반대하자 아이들은 내놓고 분통을 터뜨린다.

이 ‘학급비 사건’이 아렌트의 철학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저자는 특별수업 선생님으로 나선 호곤이의 아빠(철학과 교수)를 통해 ‘알기 쉬운 아렌트 철학 강의’를 전개한다. 호곤이 아빠가 설명하는 내용은 아렌트가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주장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다. 악한 일은 스스로 하는 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못한 데서 나온다는 것,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커다란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승진이가 아니었다면 호곤이네 반은 모두 일괄적으로 학급비를 내야 했을 것이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도 무리해서라도 전체의 의견을 따라야 했을 것이다. 대다수 학생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전체를 위해 개인이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비판적 사유 없이 전체를 따르는 것은 이렇듯 개인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도 책을 읽으면서 개인과 집단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하다. ‘정치’란 생각과 상황이 다른 개인이 의견을 조율해 조화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며, 개인의 개별성을 존중하면서 전체의 의견을 잘 모아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 읽고 나면 아렌트의 철학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며, 좀 더 공부하고 싶은 의욕도 생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