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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취한 운전대 “설마 걸리겠나” 배짱

입력 | 2006-01-23 03:03:00


누구에게나 비밀이 있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핑계’도 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된 사람이 늘면서 덩달아 면허취소가 억울하다며 법에 호소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서울행정법원에 접수되는 자동차운전면허 취소처분 취소청구소송은 일주일에 10여 건에 이른다.

이들은 소장에서 술을 먹고 운전을 할 수밖에 없었던 구구절절한 ‘핑계’를 대며 법원의 선처를 구한다.

최근 한 달 간 서울행정법원에 접수된 자동차운전면허 취소처분 취소청구 소장을 통해 이 시대 주당(酒黨)들의 ‘핑계없는 무덤’을 들여다본다.


▽“택배 못하면 부모 약값-딸 양육비 못대”=유통업체 택배직으로 일하고 있는 김모 씨는 지난해 추석 특수로 일요일에도 출근을 했다고 주장했다.

일을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온 김 씨는 마침 이혼한 아내가 키우고 있는 초등학교 4학년 딸이 집에 오지 않느냐고 전화를 하자 속 상한 마음에 회사 동료와 술을 마셨다.

김 씨는 ‘일요일인데 설마 음주단속을 하랴’라는 생각으로 운전대를 잡았다가 면허가 취소됐다고.

김 씨는 “부모 약값, 딸 양육비, 월세 등 생계를 위해서라도 택배운전사인 내게 운전면허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라며 선처를 호소.

▽“단지 600m 운전한 건데”=김모(45) 씨는 2000년 이후 직장에서 명예퇴직한 뒤 뚜렷한 직업을 갖지 못했다. 변변한 기술도 없는 40대를 채용해 줄 회사는 없었다. 그러던 중 김 씨는 지난해 11월 “직장을 알아봐 주겠다”며 연락해 온 선배와 자신의 집 근처 호프집에서 맥주 2병을 나눠 마셨다.

하지만 구직에 대한 부푼 희망도 잠시 후 사라졌다. 김 씨는 선배와 헤어진 후 600m 정도 차를 몰다 음주 단속에 걸려 면허가 취소됐기 때문. 김 씨는 “실직의 괴로움도 큰데 면허까지 취소당하면 살 길이 더 막막해진다”고 읍소했다.

▽“환자들 건강을 위해서라도…”=지난해 9월 혈중 알코올 농도 0.132%로 면허가 취소된 한모(31) 씨는 “현재 근무하는 회사는 국내에서 유일한 약 포장기계 제조·납품회사”라며 “약 포장기계가 병원이나 약국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인 만큼 전문기술자인 내가 해직된다면 긴급을 요하는 환자들에게 피해가 돌아갈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음주운전 구제 거의 없어=아무리 그럴듯한 핑계를 대도 법원에서 면허 취소처분 취소 청구가 받아들여지는 사례는 드물다. 지난해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됐다가 “학문적으로 기여한 바가 크다”며 구제됐던 한 대학 교수에 대한 항소심에서 법원은 “면허 취소가 정당하다”며 1심 판결을 뒤집었다.

한 변호사는 “가끔씩 이뤄지는 특별사면이나 생계형 음주운전자에 대한 구제조치가 오히려 상습 음주운전자를 양산한다는 비판에 최근 법원의 구제 사례도 드문 편”이라고 말했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