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와 관련된 주인공은?
‘①청각장애인 ②예수의 생애 ③1만 원권 지폐의 세종대왕 ④흰 고무신과 빨간 양말.’
정답은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화백’이다.
1913년 2월 18일 태어난 그는 일곱 살 때 장티푸스에 걸려 ‘청력’을 잃었다. 그는 그림을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1931년 18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으며 6·25전쟁 중이던 1952년부터 2년간 피란지인 전북 군산시에서 ‘예수의 생애’ 연작 30점을 완성했다.
운보는 정밀묘사는 물론 조선 민화의 익살과 추상화까지를 아우르면서 ‘거장(巨匠)’의 반열에 오른다. 1975년 운보가 그린 1만 원짜리 지폐 속의 세종대왕 얼굴은 강산이 3번 바뀐 지금도 서민의 지갑 속에 담겨 있다.
화가였으되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장애인을 위한 마음 씀씀이도 따뜻했던 그였다. 1984년 충북 청원군에 ‘운보의 집’을 세워 청각장애인에게 도자기 굽는 법을 가르쳤고 한국청각장애인복지회 설립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말이었던 1944년 결전미술전에 조선군 보도부장상을 받은 ‘적진육박’을 그렸다는 이유로 친일 시비에 휘말렸다. 1999년 ‘옷 로비 사건’ 당시 그의 작품이 로비용으로 사용됐다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운보가 한국 화단에 큰 획을 그은 대가(大家)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1996년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진 그는 불편한 몸에도 2000년 미수(米壽·88세)를 맞아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운보 바보예술 88년’전에 나타났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옥색 모시 한복에 고무신과 빨간 양말 차림으로.
이 전시회는 운보의 ‘마지막 잔치’였다. 이 행사를 주최했던 갤러리현대 박명자(朴明子) 대표는 “선생님은 1970년대 저에게 ‘화랑을 열어 보라’고 권해 주신 동양화계의 큰 별이었다”고 회상했다.
운보는 평소 “바보란 덜 된 것이며 예술은 끝이 없으니 완성된 예술은 없다. 그래서 바보산수를 그린다”고 종이에 적곤 했다.
소리를 잃은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던 그는 2001년 1월 23일 세상을 등질 때까지 1만여 점의 그림을 남겼다.
자신의 호처럼 ‘구름 같은 삶’을 살았던 운보. 그는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흰 고무신에 빨간 양말’ 차림으로 세속(世俗) 풍경(風景)을 그리고 있진 않을는지.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