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은 ‘설화(雪禍)’에 눈물을 흘렸고 상인들은 ‘화마(火魔)’에 좌절했다. 생전 처음 경험한 폭설, 순식간에 재산을 삼킨 불길에 망연자실했다. 지난해 12월은 다시 생각하기 싫은 시간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기 힘들었다. 어디서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고, 정부를 탓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다시 일어섰다. 훈련을 중단하고 주민을 도운 장병들, 시장을 찾아 손을 잡아 주는 시민들이 있었기에 외롭지 않았다. 쓰러진 비닐하우스를 다시 일으켜세웠고 잿더미 속에서 꺼낸 물건을 다시 팔기 시작했다.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기까지는 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힘든 가운데서도 설 연휴를 앞둔 농민과 상인들은 재기를 다짐하고 있다.》
■장성 회사촌마을
“군인도 떠나고…이젠 혼자 힘으로 일어서야죠.”
23일 오후 전남 장성군 황룡면 회사촌 마을. 동네 어귀에 들어서자 비닐하우스를 철거한 자리에 싹둑 잘린 철제 파이프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작물을 살리려고 하우스 안에 세워 놓은 버팀목이 위태로워 보였다. 단지 안쪽으로 들어가자 냉해를 입어 노랗게 변한 호박과 토마토가 짓이겨져 있었다.
이 마을은 지난해 12월 3일 첫 폭설로 비닐하우스 60동이 주저앉았다. 21일 2차 폭설 때는 20동이 무너졌다. 못쓰게 된 토마토, 딸기, 피망을 제외한 시설하우스 피해만 수십 억 원에 이른다.
문형식(45) 이장은 “군인들이 도와줘 무너진 비닐하우스를 걷어내는 등 응급 복구를 마쳤지만 앞으로가 걱정”이라면서 “복구비가 빨리 나와야 설을 쇠고 비닐하우스를 새로 지을 수 있다”며 애태웠다.
주민 김명수(55) 씨는 “특별재난구역으로 선포돼 부담이 줄었지만 그래도 전체 피해액의 55%를 융자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피망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 6동이 파손돼 2억 원의 피해를 봤다. 이 마을과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월평리. 딸기와 호박, 상추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 150동 가운데 절반이 파손됐다.
김동우(43) 이장은 “하우스를 다시 짓고 작물을 증식하는 데 최소한 한 달이 걸린다”며 “새로 재배할 수 있는 것은 수박밖에 없는데 시기를 놓치지나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호남 지역 복구 지원비는 전남 3314억 원, 전북 3141억 원, 광주 403억 원 등 6858억 원. 행정 절차 때문에 복구비는 다음 달 초에 지급될 것으로 보인다.
전남 나주시민들은 피해 복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지만 이날 오전 나주역 광장에서 복구에 나섰던 군 장병을 따뜻한 마음으로 보냈다.
나주시 산포면 덕례리 최종주(56) 이장은 “폭설을 헤집고 마을을 찾아와 언 손을 불어가며 작업을 벌인 장병 덕분에 다시 일어설 힘이 생겼다”고 말했다. 205특공여단 배기수(52) 중령은 “며칠 전 의용소방대, 주민과 함께 조촐한 마을 잔치를 열었다”며 “실의에 빠진 주민에게 희망을 심어 주고 가게 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장성=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대구 서문시장
“자, 떨이요 떨이. 무조건 5000원입니다.”
지난해 12월 29일 화마(火魔)가 할퀴고 간 대구 중구 서문시장 2지구. 설을 앞두고 손님이 몰리면서 상인들의 입가에 모처럼 웃음꽃이 피었다.
20일간 계속된 농성으로 차단됐던 시장 진입로가 다시 개방돼 쇼핑객이 몰고 온 승용차와 노점으로 크게 붐볐다.
상인들은 폐허로 변한 상가건물을 차단한 안전펜스 옆에서 노점을 하면서 옷가지와 냄비, 프라이팬을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애썼다.
김정호(가명·42) 씨는 “노점을 한 지 일주일 됐는데 설 대목이라 팔리는 물량은 제법 늘었지만 돈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도매가 2만∼3만 원짜리 화장품 세트를 1만 원에 팔고 있다. 그는 점포가 모두 타서 권리금 4000만 원을 다 날렸다. 남은 물건을 처분하는 대로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을 생각이다.
생선 판매점을 하는 김동섭(36) 씨는 “단골들이 하루 50∼60명 찾아와 지난해 물량의 30% 정도는 팔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대체 상가 논란으로 봉쇄됐던 시장 내 주차빌딩도 이날 개방됐다. 주차장을 이용하려고 대기 중인 승용차 수십 대가 시장 내 곳곳을 막았으나 상인들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시장 근처에 임시 점포를 연 강정순(50·여·이불판매상) 씨는 “가게 있는 곳을 어렵게 찾아온 단골이 힘내라며 손을 잡아줄 때 기운이 난다”며 “꼭 재기해서 도움을 준 단골에게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주부 김명희(40) 씨는 “할인마트 대신 서문시장을 찾아 생선과 아이들 옷 몇 벌을 샀다”며 “서문시장이 빨리 옛 모습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문시장 지구상인연합회는 시장 부근 베네시움 건물(점포 900개)과 주차빌딩 지하 1, 2층(점포 150여 개)을 대체상가로 정했다.
베네시움 김병옥(金炳玉) 전무이사는 “하루 평균 50여 명의 상인이 건물을 둘러보고 간다”며 “3월 중이라도 상가가 문을 열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상인을 돕기 위한 각계의 성금이 이어져 23일까지 365건 5억9100여만 원이 모금됐다.
대구=정용균 기자 cavati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