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모차르트의 초상화. ② 모차르트의 탄생지인 잘츠부르크 시내에서는 27일 모차르트의 생일부터 2월 5일까지 ‘모차르트 주간’ 축제가 열리고 있다. ③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터키 출신 작곡가 파질 세이가 새롭게 재창조한 음악에 맞춰 춤으로 표현한 ‘모차르트 Two-6’. ④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선보이는 인형극 오페라. 이 오페라는 인형이 연기하고 성악가가 인형 뒤에 숨어 노래를 부르는 실험적 형식이다.
《27일은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 되는 날. 그가 활동한 오스트리아 빈과 고향인 잘츠부르크 시는 흥분에 가득 차 있다. ‘모차르트 상표의 경제 효과는 88억 달러’라는 상업적 의미만은 아니다. 빈과 잘츠부르크를 다시 한번 당대(當代) 음악의 중심지로 되살리고자 하는 노력, 바로 ‘모차르트 정신(Spirit of Mozart)’의 부흥을 꿈꾸는 것이다.》
○ 연극-무용 등 기념이벤트 연 2600건 계획
하루 평균 7개, 관련 행사 연 2600여 건. 올 한 해 빈 시가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맞아 벌일 각종 공연과 행사 수다. 주목할 점은 모차르트의 원곡을 다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모차르트를 재해석하거나 그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은 현대음악 작품 발표와 연주가 집중된다는 것이다. 빈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꼴로 현대음악이 초연된다.
그중 야심 찬 기획이 ‘새로운 오페라 빈’이다. 올해는 ‘마술피리 06’, ‘피콜레토를 위한 레퀴엠’, ‘돈 주앙이 전쟁터에서 오다’, ‘라덱’ 등 창작 오페라를 선보인다. 이 프로젝트에는 지난 3년간 매년 2000만 유로의 예산이 들어갔으며, 향후 4년간의 예산도 이미 책정돼 있다. 이 외에도 모차르트의 음악을 무용으로 만들거나, 수십 명의 젊은 영화제작자가 1분짜리 모차르트 영화를 만들어 상영하는 등의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 궁정음악가라는 안정된 삶을 거부한 채 빈에 온 것은 1781년. 그는 생애 마지막 10년간 이 곳에서 프리랜서 음악가로 활동하며 황금기를 보냈다. 오스트리아 문화부의 안드레아스 말리아스 포코니 씨는 “만일 당시 빈처럼 독립음악가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없었다면,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피지도 못하고 땅에 묻혔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는 20일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가 지휘하는 빈 필의 연주로 모차르트 주간 페스티벌을 시작했다. 7∼8월 열리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는 6주간 모차르트의 오페라 22곡 전곡을 무대에 올린다. 아르농쿠르, 리카르도 무티, 대니얼 하딩 등 세계적인 지휘자가 초빙됐으며, 마리오네트 인형극을 이용한 오페라 등 파격적 연출도 많다. 그러나 올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프로그램은 ‘모차르트 오페라 사이클’과 모차르트 연주회 외에는 모두 현대음악이다. 오스트리아 작곡가 헤아베르트 빌리 등 현대음악가 15명의 새로운 음악이 세계 초연된다. 잘츠부르크 주립극장의 지휘자 카이 뢰리히 씨는 “사람들의 귀에 익은 고전 음악만 연주하면 음악회장이 박물관이 돼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인이 너무 진지하게 듣는 것은 코미디
“만일 모차르트가 살아 있다면 그는 아마도 록이나, 힙합, 랩도 자유자재로 구사했을 것이다. 디베르티멘토, 세레나데 등 파티에서 와인을 마시면서 흥겹게 듣도록 작곡된 모차르트 경음악을 오늘날 현대인들이 음악 홀에서 진지하게 듣고 있는 모습은 코미디다.”
잘츠부르크에서 30년간 활동해 온 이윤국(모차르테움 음대) 교수는 “모차르트는 당대의 팝스타였다”며 “역사상 가장 동시대의 음악을 즐기지 않는 20세기, 21세기에는 새로운 모차르트가 태어나기 힘들다”고 말했다.
모차르트는 귀족을 위한 교향곡이나 오페라뿐 아니라 수많은 파티용 경음악과 종교음악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625곡에 이르는 걸작을 남겼다. 이것은 매일 새롭게 창작되는 곡을 처음으로 듣는다는 설렘을 안은 채 공연장을 찾았던 당대의 청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새로운 오페라 빈 2006’의 총감독인 발터 코베라 씨는 “아직도 빈은 모차르트가 활동하던 시대처럼 창의성이 살아 숨쉬는 도시라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고 기획 취지를 설명했다. 빈 시는 이를 위해 올해 전체 기념행사 수익금의 1%를 젊은 음악인들을 지원하기 위한 ‘모차르트 펀드’로 사용할 예정이다.
‘빈 모차르트의 해’ 총예술감독 페터 마베(사진) 씨는 모차르트가 21세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모차르트의 인생은 인간과 인간, 아버지와 아들, 부자와 음악가, 예술과 사회, 천국과 지옥과의 관계 등을 돌이켜보게 만든다. 모차르트는 음악만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것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모차르트는 오늘에 살아 있다.”
빈·잘츠부르크=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모차르트 vs 살리에리’는 작가들 상상의 산물▼
모차르트가 남긴 불후의 선율을 제외하고 그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다른 요소를 들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모차르트 자신이 시대와 나라를 달리해 가며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왔다는 점일 것이다. 바로 그와 선배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1750∼1825)와의 갈등이 그 소재다.
애초에 두 사람은 음악인으로서 선후배였을 뿐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의 궁정 음악교사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고, 모차르트가 만든 오페라 ‘코지 판 투테’의 상연에 살리에리가 1790년 제동을 건 적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천재 모차르트에 대한 범인(凡人) 살리에리의 질투심’이라는 테마는 숱한 작가들의 창작욕을 건드렸다. 1788년 살리에리가 빈의 궁정 악장이 되고 3년 후에 모차르트가 숨지자 둘 간의 알력은 유럽 사교계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살리에리가 숨지자 1830년 러시아 작가 알렉산데르 푸슈킨은 단편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를 발표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을 것이라는 이 이야기는 곧 전 유럽으로 퍼졌고 잡지와 연극에서 이를 여러 번 다뤘다.
1979년 초연된 영국 극작가 피터 섀퍼의 연극 ‘아마데우스’는 이 같은 소재가 진화한 하나의 절정이었다. 여기에 힘을 더 보탠 것이 밀로시 포르만 감독이 1984년 선보인 명작 ‘아마데우스’다. 이 영화는 이탈리아인 살리에리가 오스트리아인 모차르트와 벌인 갈등을 영국인(섀퍼)이 시나리오로 쓰고, 체코인이 감독하여 미국 제작사(워너 브러더스)에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범(汎) 서구적인 면모를 갖췄다. 오스카상 8개 부문을 수상하고 상업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