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길어지고 있다. 요즘의 시는 낯선 제목에다 얘기가 길고 기법이 복잡하며 소재가 엉뚱하다. 한두 줄의 시나 낙서 같은 쉬운 시는 인터넷 글짓기방에 들어가 보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시인들은 그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방법으로 시를 쓰기로 했나 보다. 길고 어렵게…. 그리고 ‘기발한 표현’으로 독자가 여러 번 읽어야만 이해가 될까 말까 하게 쓴다.
그런 시를 다 읽고 나면 ‘아름답다’거나 ‘좋다’라기보다는 어지러운 앙금이 고인다. 하지만 그 시는 머리 안에 오랫동안 가라앉아 있다가 한가한 틈을 비집고 나와서 나를 흔들며 존재를 알린다.
이미 문학은 독자의 입맛에 따르지도 않고, 독자 수준을 생각지도 않고 자기 길을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세계는 시인이 만들어 놓은 가상의 세계일 수도 있다.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한 사람만이 그 세계를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자기의 경험으로 아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하루하루 퇴보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학습으로 얻은 지식이나 삶의 지혜로도 설명이 안 되는 경우가 많이 생기고 있다. 그래서 ‘감성본위 시대’가 오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 쓰나미(지진해일) 사태에서 보듯, 세상에는 지진이나 가뭄 혹은 폭우 등 재앙이 올 것을 미리 알고 피하는 미물(微物)이 많다. 그들은 다가올 위기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몸에 와 닿는 파장으로 안다고도 하고 그들의 DNA 속에 기억의 지도가 있다고도 한다.
우리한테는 짐작이라는 좋은 말이 있지만 설명하기 어려울 때 그냥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 십 리쯤 될 거야.” “한나절은 걸릴 거야.” “한소끔 끓여서 건져내야 해.”
십 리가 반드시 4km는 아니다. 거기에다가 ‘쯤’이라는 애매한 여분이 더 붙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한나절이란 하루 낮의 반을 의미하는데 하루 낮의 길이를 몇 시간으로 잡는 것일까. 한소끔은 또 몇 초 동안일까. 이처럼 애매한 잣대로도 옛날 사람들은 불편 없이 살았다.
지금 우리는 과학과 정보기술(IT)이 주도하는 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정보를 잘 이용하면서 눈치껏 살고 있는 사람들을 똑똑하다고 말한다. 정보를 만들어내는 과학자들은 언어와 수학이란 수단으로 모든 상황을 설명한다. 그러나 요즘 언어와 수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더 많다는 걸 깨닫고 만다.
이라크에서 무기와 전략이 우수하면 승리한다는 전쟁의 원칙도 조각이 나 버렸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변하고 튀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보수주의자가 늘어 가고 있다는 건 또 무얼까. 그렇다면 설명할 수 없는 그 부분은 느낌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다. 분석하고 숫자로 표시되는 것으로 답을 구하는 방법에서 자연의 지도를 읽을 수 있는 ‘느낌’이 필요한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느낌으로 살기’란 말을 새로 만들어 보면서 행복을 느낀다.
새해가 꽤 지났지만 남은 날짜가 여전히 많다. “잘 안 되면 어쩌지”보다는 “어쩌면 잘될 것 같은데”라는 느낌으로 올해를 살면 어떨까.
김이연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