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이 힘들어한다는데 가장 시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가.” 서슬 퍼런 광해군의 물음에 전시(殿試·임금 주관 아래 최종 합격자의 순위를 가리는 과거시험) 응시자인 임숙영(任叔英)이 답한다. “나라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원인은 바로 임금 자신에게 있습니다.”
합격은커녕 목숨마저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직언의 용기와 소신을 높이 평가한 좌의정 이항복의 도움으로 임숙영은 병과에 급제했다. 전제군주시대에도 국정 운영의 잘못이 임금 탓이라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당찬 선비정신과 이를 포용하는 정치가 살아 있었다. 백성이 초근목피로 연명했던 가난한 조선의 왕조가 500년 넘게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건 선비들의 직언과 이에 대한 백성의 신뢰 때문이라고 역사가 신봉승 씨는 말했다.
이른바 ‘선출된 권력론’을 내세운 핵심 코드 인사들의 제왕적 대통령 만들기가 노무현 정권 후반기에 들어 도를 더해 가고 있다. 권력과 정권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생명으로 하는 언론과 지식인을 막말까지 동원하여 매도하고 협박하고 있다.
“서민을 향한 대통령의 애정은 끝이 없다”는 청와대발(發) 노비어천가가 들린다. 검찰권 운용을 둘러싼 문제가 불거지자 청와대는 ‘현행법의 운용과 시대정신에 대한 최종 해석권은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에게 있다’고 유권해석을 내렸다. 드디어 언론에 비판적 칼럼을 쓰는 지식인을 겨냥해 “×도 아닌 ×× 몇 놈이 대통령을 비난하고 있다”며 “옛날 같으면 모두 구속시켰을 것”이라는 법무부 장관의 막말까지 나왔다. 가장 민주적, 비권위적이라고 현수막을 내건 참여정부의 무대 한쪽에서 나오는 소리다.
법률의 해석과 집행을 둘러싼 정치사회세력의 갈등에 대한 최종적인 해석권은 법원과 헌법재판소에 있다. 대통령도 사법부의 판단에 복종해야 한다. 헌재의 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 결정이 나오자 대통령과 여권(與圈)은 “선출된 권력이 제정한 법률을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무력화(無力化)한 것은 의회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위헌심사권을 규정한 헌법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말이다. 선출된 권력일수록 국민의 신뢰와 지지에 그 존립 근거를 두어야 한다. 헌법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어 직접적으로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대통령도 탄핵 대상 공무원에 포함시키고 있다. 아무리 강한 국가권력의 소유자라도 법 위에 있지 않음을 명백히 한 것이다.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을 핵심으로 하는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초석이자 기둥이다. 대통령의 공식 발언은 정책으로 이어지거나 국가 진로에 영향을 미치므로 이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비판언론에 게재된 어떤 칼럼에서도 대통령의 정책 관련 발언을 전제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인신공격성 글을 본 적이 없다. 대통령 발언에 대한 비판을 대통령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몰아세워 구속 운운하는 것은 군사독재 시절을 연상시킨다.
노 대통령은 집권 3년이 다 된 이제 코드인사 때문에 실패로 끝난 국정시스템을 과감히 전환해야 한다. 언론과 지식인들의 비판적 대안을 받아들이는 겸허함이 요구된다. 특정 계층이나 집단에 고통을 가해 다수 국민의 ‘배 아픔’을 해소함으로써 정권을 유지하고 재창출하겠다는 발상은 이젠 안 된다. 이는 사회의 역동성을 해치고 공멸로 가는 길이다. 편 가르기 식 국정운영은 헌재가 2004년 5월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사건 결정문에서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의 범위를 초월하여 국민 전체에 대해 봉사함으로써 사회공동체를 통합해야 할 책무를 지고 있다’고 지적한 것에도 어긋난다. 선출된 권력도 만능이 아니다.
통치 가능한 지지율의 하한선은 30%라는 게 일반적 견해이다. 노 대통령의 20%대 지지율은 코드화와 편 가르기가 아닌 통합의 리더십이 절실함을 말해 준다. “천 사람이 ‘예’라고 하는 것이 선비 한 명이 옳은 소리를 하는 것과 같지 않다”는 사기(史記)의 말처럼 지금 대통령에겐 임숙영 같은 선비의 정직한 충고가 필요한 때다.
이석연 객원논설위원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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