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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북한 엿보기]대도시 묘지 불허

입력 | 2006-01-26 03:00:00


《보름 전, 눈보라 치는 겨울밤. 나무 한 그루 변변히 없는 함북 청진시 교외의 한 야산에 천으로 싼 시신을 들쳐 메고 한 사내가 눈물을 흘리며 오르고 있었다. 그 뒤로 삽과 곡괭이를 든 여러 그림자가 뒤따랐다. “이쯤에다 묻자.” 사내가 시신을 내려놓자 그림자들이 눈을 치우고 언 땅을 파기 시작했다. 소리가 날까 조용조용 파기를 5시간여. 멀리 바다에 동이 틀 무렵에야 겨우 시신이 들어갈 만큼 땅이 파졌다. 시신을 묻고 눈으로 흔적을 지운 다음 일행은 산을 내려왔다. “봄에 다시 와서 묘를 손질하자.” 사내는 청진시에 사는 최창규 씨. 시신은 그의 아내 오모 씨다. 뒤따르던 그림자는 자식들과 친척들이었다. 》

아내 오 씨는 병으로 바깥출입도 못하던 병자였지만 살아보겠다고 무진 애를 쓰던 사람이었다. 그런 아내가 며칠 전 식음을 전폐하다 끝내 숨졌다.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 애인을 사귄 아들이 “엄마, 여자가 집에 올 때 딴 집에 좀 가 있어요”라고 한마디 한 게 오 씨에겐 충격이었다. 다행히 오 씨는 땅에 묻힐 수는 있었다. 비록 묘비도 봉분도 없었지만. 대신 남편 최 씨는 당의 방침을 어겼다.

지난해 당국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도시 주변 산에 묘지만 가득하다며 무조건 화장(火葬)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평양에서는 2004년부터 실시됐다.

2002년에 하달된 방침은 봉분을 깎아 없애고 묘비는 최대한 낮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3년 만에 다시 매장 불가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청진시에 하나 있던 화장터가 재가동되기 시작했다. 비용은 북한 돈 9만 원(약 30달러) 정도. 납골당은 없고 뼛가루는 단지에 담아 유족에게 돌려준다.

조금 지나자 청진 시내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한꺼번에 3명씩 화장한대.” “어느 집에서는 단지에서 벌레가 기어 나온대.”

노인들은 한탄했다. “내가 죽을 때를 잘못 만났지. 아들아, 난 땅에 묻히고 싶다.”

방법이 없지는 않다. 아직 화장은 대도시에서만 시행된다.

차를 세내 농촌에 가서 묻으면 된다. 하지만 서울∼수원 정도의 거리도 10만 원은 넘게 줘야 한다. 근로자 평균 월급이 2000∼3000원이다.

산림보호원에게 뇌물을 주고 가까운 산에 묻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최 씨는 가진 돈이 없다. 최 씨가 장사해 버는 돈과 딸이 받는 월급 2000원(약 0.7달러), 그리고 배급을 더해 그날그날 겨우 먹고산다. 그들의 선택은 야반 암매장뿐이었다. 아내를 묻은 직후 최 씨는 탈북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묘지 보기 싫다” 김정일이 화장 지시

■ 전문가 한마디

1995∼98년 북한 주민 300만 명이 굶어죽거나 병사했다. 야산에 묘지가 줄을 이었다. 묘지가 갑자기 많아지자 당은 ‘보기에 안 좋다’며 화장을 지시했다. 말이 당의 지시지 사실은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지시다. 김 위원장의 말 한마디에 장묘문화까지 바뀐다. 이것이 북한식 수령 독재다. 1980년대 말에는 ‘여성들이 치마를 입고 자전거를 타서는 안 된다’는 지시가 있었다. 역시 김 위원장의 지시다. 자전거는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 중 하나다. 그런데 ‘보기 싫다’고 치마 입은 여성들의 자전거 타기를 금지시킨 것이다. ‘1호 도로’라는 게 있다. 1년 내내 다른 차는 못 다니고 김 위원장의 승용차만 다닐 수 있는 도로다. 북한 체제는 2300만 인민들이 김정일 개인을 위해 복무하는 사회다.

손광주 데일리NK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