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보스와 평양은 딴 세상이다.
스위스 휴양지 다보스에서는 25∼29일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이 열렸다. 89개국 지도자, 기업인, 석학 등 2300여 명이 몰려들어 경제와 국제질서의 미래를 논하며 그 속에서 자기 나라의 국익을 모색했다.
올해 평양발 첫 뉴스의 키워드는 여전히 ‘우리식 사회주의’였다. 정권을 대변하는 노동신문 등의 신년사설은 “사회주의만이 참된 삶과 행복을 꽃피워 준다는 확신, 우리식 사회주의는 승승장구할 것이라는 낙관이 우리가 지녀야 할 혁명적 신념이다”고 강조했다.
다보스와 평양에 공통점이 있기는 하다. 중국 열풍이다.
빌 게이츠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은 다보스포럼에서 “중국이 소비자들에게 이익을 주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창조했다”는 말을 남겼다. 클라우스 슈바프 WEF 회장은 “세계경제의 미래는 중국과 인도의 성장에 크게 좌우될 것”이라고 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8일 저녁 평양주재 중국대사관 직원들과 대안친선유리공장의 중국 기술진을 초청해 성대한 공식 파티를 열었다. 중국 최고 명절인 춘제(春節)이기도 했지만 김 위원장이 중국 관계자들과 설날 기념 연회를 연 것은 처음이다. 이날 김 위원장은 평양에 체류하는 중국 유학생 실습생까지 불러 신년 경축공연을 함께 보기도 했다. 이튿날 북한 조선중앙TV는 김 위원장의 중국 방문(1월 10∼18일) 기록영화를 57분간 방영했다.
다보스포럼과 때맞춰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는 세계사회포럼(WSF) 미주대회가 열렸다. 대회를 주도한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27일 이 나라 모든 TV를 통해 “자본주의가 빈곤의 주된 원인”이라며 “오로지 혁명적 변화로 이끄는 사회주의만이 인민들에게 희망을 준다”고 연설했다.
다보스포럼이 세계화(世界化)를 지향한다면 세계사회포럼은 반(反)세계화의 거점이다. 세계화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전(全) 지구적 확산을 뜻한다. 중국은 다보스포럼에 쩡페이옌(曾培炎) 황쥐(黃菊) 두 부총리를 비롯해 150여 명의 대표단을 보내 8개의 세미나를 주도했다. 차베스 대통령이 자본주의를 ‘타도해야 할 적(敵)’으로 몰아붙이던 시간에 중국은 ‘새로운 자본주의 창조국’으로 떠올랐다. 그렇다면 ‘우리식 사회주의’를 자랑하는 북한 정권에는 중국보다 베네수엘라가 더 어울리는 나라다.
그러나 요즘 김 위원장은 오로지 중국을 쳐다보는 모습이다. 폐쇄적 사회주의경제의 한계, 달러 위조 범죄 등이 자초한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중국이 ‘해결사’만 돼 준다면 하늘 같은 권위도 접을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
중국과 인도가 지구촌의 주목을 받는 ‘비결 아닌 비결’은 세계경제지도(地圖)를 새로 그리게 하는 역동성(力動性)에 있다. 두 나라의 줄기찬 고속 성장은 각국에 투자와 시장 개척의 무한한 기회를 주는 동시에 빨려 들 것 같은 두려움을 안기고 있다.
우리나라도 다보스포럼에 20여 명이 참가했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차기 유엔사무총장 경합자들과 ‘수능시험’을 치렀고, 이명박 서울시장은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들을 만나 마곡R&D시티 등에 대한 투자 유치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한국은 300개가 넘는 포럼 세미나 가운데 단 하나의 주제도 되지 못했다. 26일 ‘타오르는 민족주의 잠재우기’ 세션에서는 한국 중국 일본의 민족주의 갈등에 대한 토론이 있었지만 중국 일본과는 달리 우리 측 참석자는 현장에 없었다.
집안에서는 큰소리다. 경제 대국화를 바탕으로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더욱 키운 ‘거인(巨人) 중국’이 아직도 미국을 향해 고개를 들지 않고 조용한 외교를 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대통령부터 ‘미국과 마찰할 수 있다’고 가볍게 말한다. 그러면서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으로 성장 대신 분배, 균형, 양극화 해소부터 외친다. 규제를 풀어 시장을 활성화할 생각보다는 세금 더 거둘 궁리부터 한다. 역시 다보스포럼에서도 “세금 늘려 저소득층 지원하는 방식은 성장을 해치고 하향 평준화를 낳을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기업이 일자리를 만들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정부는 좋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답이라는 얘기다.
서울도 다보스와 딴 세상 같다.
배인준 논설실장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