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심 전 국립국어원장은 지난달 퇴임한 뒤 모처럼 휴식 시간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는 “사람은 언어를 통해 정제되고 명석한 사고를 배우며 지식을 습득하고 자기를 표현한다”며 “말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늦은 잠을 ‘늦잠’이라고, 꺾인 쇠를 ‘꺾쇠’라고 쓰는데 ‘먹거리’는 왜 안 됩니까. 말을 문법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편협해요. 말도 사람처럼 생명과 감정이 있습니다. 보편적 생명을 얻은 말을 문법이 틀렸다고 죽일 수는 없는 거죠.”
한평생 우리말 지킴이로 살아온 원로 국어학자의 말치고는 파격적이다. 남기심(南基心·70) 전 국립국어원장은 “표준말은 국어학이 아니라 생활언어의 관점에서 다뤄야 한다”며 “언어라는 과학적 구조체와 삶이 만나는 접점에 말이 있다”고 강조했다.
만 5년의 임기를 마치고 지난달 21일 퇴임한 그를 만났다. 그가 국어원장으로 재직하던 중 돋보였던 성과는 ‘말이 생명체’임을 일반인이 깨닫게 했다는 것이다.
학자뿐 아니라 말의 ‘현장’에 있는 언론, 출판계 인사들을 표준어사정위원회에 불러 모아 ‘뜨락’ ‘내음’ 등 방언으로 내침을 받던 말들에 표준어의 새 생명을 부여했다. 또 2004년 국어원과 동아일보가 공동으로 시작한 ‘모두가 함께하는 우리말 다듬기 운동’을 통해 ‘누리꾼’ ‘다걸기’와 같은 말들이 태어나 제 자리를 잡았다.
“통신언어에서 드러나는 젊은이의 창의력을 우리말 다듬기에 흡수해야 합니다. 통신언어가 문법을 파괴한다고 걱정하지만 그중에 재치 있는 표현이 많아요. ‘선생님’을 ‘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격식을 깨면서 쾌감과 자유를 느끼는 동시에 언어의 실상을 포착하는 음성적 능력을 보여 주는 거죠. 그런 관찰력과 자유분방함이 굉장히 큰 에너지입니다.”
그는 지난해 이뤄진 국어기본법 제정을 가장 기억나는 일임과 동시에 아쉬운 일로 꼽았다. 당장 정부기관부터 법에 규정된 대로 우리말을 사용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현 정부 들어 ‘로드맵’ ‘어젠다’와 같은 외래어 사용이 심해졌어요. 우리말에 없는 개념의 외국어를 쓰는 것은 할 수 없지만 우리말에 이미 있는데 외국어를 들여와 이중구조를 만드는 것은 문제입니다. ‘어버이’가 있는데 ‘부모’라고, ‘길’이 있는데 ‘도로’라고 자꾸 쓰면 본래 있던 우리말이 죽어 버리거든요.”
영어를 잘해야 경쟁력이 향상된다는 것은 치열한 경쟁사회의 생존법칙이다. 그럼 우리말을 잘하는 것도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될까.
“같은 나이, 같은 직종에 근무하는 두 나라의 노동자가 있다고 칩시다. 한 사람이 구사하는 어휘가 1000개, 다른 사람은 2000개라면 어느 쪽 노동의 질이 높고 기술력 향상이 더 빠르겠습니까. 어휘 능력의 차이는 곧 지식 능력, 경쟁력의 차이입니다.”
남 전 원장은 또 “언어 능력은 그 나라 국민의 언어적 교양의 수준이자 문화의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일상생활에서 보고 느끼는 안타까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건물 곳곳의 소화전에도 ‘호스를 잡고 발화지점까지 전개하여’ 같은 식의 사용 설명서가 붙어 있어요. ‘끌고 가서’라고 쓰면 되지 왜 ‘전개하여’입니까. 그 설명서 읽고 있다가는 아마 건물이 불에 다 타 버릴걸요.”
그는 “개화기 때부터 언문일치 운동을 했는데 아직도 이처럼 쉬운 말을 어렵게 쓰고, 글은 말과 달라야 한다는 이중의식이 남아 있다”면서 “교육에 일차적 책임이 있고 사회지도층의 언어의식이 약한 것에도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남 전 원장은 갑자기 10년 전 캐나다 로키 산맥 여행담을 들려주겠다며 말머리를 돌렸다.
로키 산맥에 있는 루이스 호수엔 석회가루가 섞여 물빛이 청백색을 띤다. 먼 옛날 지판의 융기로 석회암으로 이뤄진 로키 산맥이 형성됐고 산봉우리의 만년설이 녹은 물에 석회가루가 섞여 호수에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다. 호수 옆엔 물이 캐나다 대륙을 거쳐 대서양으로 흘러내려가는 작은 강이 있다. 그곳의 안내문엔 이렇게 적혀 있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로 돌아가네.’
“그렇게 아름다운 안내문을 본 적이 없어요. 길고 어려운 이야기를 얼마나 쉽고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까. 한국은 이상하게 언어의식이 경직돼 있어서 그런 게 없어요. 식물원 설명은 식물학자만, 사찰 설명은 역사학자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어렵잖아요. 말에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아우르는 대중성이 있어야 상하귀천 없이 일체감을 느끼고 문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언어란 궁극적으로는 문화입니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