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20도의 겨울방학에도 학교에 나와 졸업작품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4학년 학생들. 4년 전 1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했던 33명의 동기 중 10명이 고된 수업과 연습을 견디지 못해 학교를 떠났다. 연기에 대한 학생들의 열정은 혹한도 녹일 정도로 진지하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요즘 한국의 영화와 TV, 연극계에서 활약하는 배우 박신양(38)과 김유석(39) 이항나(37·여) 씨와, 세종대 김태훈(40·영화예술학과) 교수, 연출가 전훈(40) 씨의 공통점은? 이들이 1990년대 초 러시아 연극 유학 1세대로 모스크바 국립셰프킨고등연극학교에서 수학하거나 이 학교를 졸업한 동창생이라는 점이다. 1773년 세워져 러시아에서도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이 학교는 이미 한국의 연기자 지망생들 사이에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동안 40여 명의 한국인 졸업생을 배출했고 지금도 30여 명이 유학 중이다.》
모스크바 중심 극장광장 1번지. 클래식발레의 본산인 국립볼쇼이극장이 있는 곳이다. 볼쇼이극장은 러시아어로 ‘대극장’이라는 뜻. 그 옆으로 ‘소극장’이라는 뜻의 말리극장이 위치하고 있다. 발레와 오페라 무대인 볼쇼이극장과 연극 전용 극장인 국립말리극장은 세계 정상의 러시아 공연예술을 이끄는 쌍두마차 같은 존재다.
말리극장 앞에는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로 유명한 작가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의 동상이 서 있다. 말리극장 뒤편의 유럽 고전양식으로 지어진 2층짜리 석조건물이 이 극장의 부속학교인 셰프킨학교다.
이 학교는 1943년 구소련 정부로부터 4년제 대학 인가를 받았으나 여전히 고등연극학교라는 명칭을 고집하고 있다. 학생이 250여 명밖에 안 되고 전공은 연기 하나밖에 없으며 배우를 양성하기 위한 실기 위주의 교과 과정으로 짜여 있기 때문이다. 학교 안에 들어서자 19세기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미하일 셰프킨(1788∼1863)의 흉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1832년부터 30년 동안 이 학교에서 가르치며 학교의 기틀을 잡았다. 말리극장부속학교에서 1935년 바뀐 교명도 그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복도에는 이 학교에서 배출한 유명 배우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로 국내에 알려진 올레크 멘시코프도 이 학교 출신이다.
9월에 시작되는 1학기는 1월 초에 끝나고 3주 동안의 짧은 겨울방학 후인 2월 초에 시작되는 2학기는 6월 초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겨울방학 중인데도 학교에 나온 학생이 많았다. 학교 안에는 평소에 공연 연습을 하고 졸업 작품도 올릴 수 있는 7개의 크고 작은 무대가 있다.
4학년생인 마리야 추빌리나(22·여) 씨는 3명의 동급생과 졸업작품 연습에 한창이었다. 밖은 영하 20도가 넘는 날씨. 창고같이 어두운 연습실은 외투를 벗을 수 없을 정도로 추웠고 학생들은 휴식 시간마다 손을 비비며 추위를 달랬다.
러시아 중부 니주니노보고로드 출신의 추빌리나 씨는 연극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모스크바에 와 재수 끝에 입학에 성공했다. 4년 전 100 대 1의 경쟁을 뚫고 들어온 33명의 동기 중 10명이 중도에 학교를 그만뒀다.
배우의 꿈을 키우며 체호프와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나라 러시아로 온 한국 학생들. 이들은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이어지는 수업과 연습으로 몸은 고달프지만 연극의 본고장에서 체계적인 배우 수업을 받고 있다는 자부심에 표정이 밝았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4학년생인 한승환(韓承煥·28) 씨는 “하루 종일 몸을 움직이는 수업이 이어져 너무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아침 9시까지 학교에 나오면 5, 6시간의 연기술과 무대동작 수업이 매일같이 이어진다. 거기에 수업이 끝난 후 작품 연습까지 하면 밤늦게 기숙사에 들어가고 주말에도 연습을 하기 일쑤다. 이론 과목도 대부분 연극과 관련된 것이어서 오로지 연극을 위해서만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유학생들은 과학적이고 구체적으로 연기를 배울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 학생의 반수 정도는 한국에서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거나 다니다가 유학을 왔다.
셰프킨의 교수법은 한때 이 학교를 다녔던 연극이론가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가 고안한 ‘스타니슬라프스키 시스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연기법은 배우가 배역에 몰입해 극중 인물의 내면과 일치하는 연기를 보여 주도록 심리학적 분석과 연습을 하는 것이다.
1학년 때는 아예 무대에 설 기회를 주지 않는다. 연기수업 시간에 대사도 별로 없는 에튀드(연습)만을 반복한다. 가장 기초적인 것은 사물이나 다른 사람을 관찰하는 훈련이다. 예를 들면 교수가 수업 시간에 들어오자마자 학생들에게 눈을 감게 한 후 자신이 맨 넥타이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다. 또 수업 시간 중에 갑자기 한 학생에게 두 사람 건너 뒷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지 물어본다. 이런 훈련을 통해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는 집중력을 기를 수 있다.
그 다음 단계는 상상력을 기르는 연습. 교실에 불이 났다거나 유명한 인물이 갑자기 들어왔을 때의 반응을 보여 주거나 빈손으로 총을 쏘거나 삽질을 하는 동작을 보여 주는 식이다.
2학년이 되면 주요 작품의 한 부분을 골라서 집중적으로 연습을 하고 3학년 때는 단막 작품을 연습한다. 4학년이 돼야 비로소 졸업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한 편의 연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습한다.
이런 힘든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해도 연극배우나 영화배우로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셰프킨의 학생들도 이것을 잘 알고 있다. 4학년생인 시묜 스페시프체프(22) 씨는 “공연을 앞두고 몸이라도 아프면 배역을 잃어버리기 일쑤”라며 “배우는 평생 긴장 속에서 자신을 관리해야 하는 어려운 직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묘한 매력 때문에 해마다 입학철인 6월 말이면 러시아뿐 아니라 각국의 젊은이들이 배우가 되기 위해 셰프킨으로 몰려든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아포닌 ‘셰프킨’ 교장 “한국학생 격년으로 15명 선발… 열정 대단”
“러시아 최고의 말리극장 대배우들의 연기를 직접 보고 함께 호흡하며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우리 학교만의 강점입니다.”
니콜라이 아포닌(사진) 교장은 “이는 말리극장의 부속학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1990년대 초 문화부 장관을 지냈고 구소련 정부로부터 ‘인민배우’ 호칭을 받은 유리 솔로민 말리극장 예술감독이 1960년부터 국립셰프킨고등연극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포닌 교장은 1961년 이 학교 졸업 후 1968년부터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00여 명의 교수는 무대와 연극학교만을 오가며 평생을 연극과 함께 보낸 사람이다.
해마다 50∼60명밖에 신입생을 뽑지 않기 때문에 입학경쟁률은 평균 100 대 1에 이를 정도. 재수를 해서 입학하거나 다른 연극학교에 다니다가 다시 도전하는 학생도 적지 않다. 입학시험 과목은 러시아문학과 연기오디션. 국립학교라 러시아 학생들은 학비를 내지 않는다.
외국 학생들은 별도로 전형을 한다. 학비는 1년에 4000달러(약 386만 원)가량. 한국 학생들은 2년마다 15명가량을 뽑아 별도의 ‘카레이스카야 그루파(한국인 그룹)’를 만든다. 올해가 한국 학생을 뽑는 해다.
외국인 학생들은 러시아어 교육 위주의 예비학부 1년을 포함해 5년 동안 공부해야 하지만 러시아어가 가능한 경우는 바로 1학년에 입학할 수도 있다. 현재 이스라엘과 일본 미국 등에서 유학생들이 와 있고 유럽에 마스터클래스를 열기도 한다.
아포닌 교장은 “한국 학생들은 열정이 대단하고 성실하다”고 칭찬했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