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2월 영국 베어링증권의 선물(先物) 트레이더 닉 리슨 씨는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해 선물거래에서 2000만 달러(약 200억 원)의 수익을 올려 35만 달러(약 3억5000만 원)의 연봉 외에 200만 달러(약 20억 원)의 보너스를 받았다.
이듬해 그는 원금의 10배 이상 투자할 수 있는 선물시장의 특성을 이용해 일본 닛케이선물가격이 오르는 데 총자산을 걸었다.
그러나 1월 17일 일본 고베 대지진으로 닛케이선물가격은 폭락했다. 리슨 씨는 이 투자로 무려 670억 엔(약 6000억 원)을 날렸다. 이 초대형 금융사고로 유럽 최고의 금융그룹이었던 베어링은 한순간에 부도를 내고 사라졌다.
증시에서 이른바 ‘지렛대 효과’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깡통’ 위험 부추기는 지렛대 효과
최근 국내 증시에 지렛대 효과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검은 월요일’로 불린 지난달 23일 주가가 폭락하면서 깡통 계좌(총평가 잔액이 0원 이하인 계좌)가 속출했다.
하루에 주가가 떨어질 수 있는 폭은 최대 15%. 그런데도 원금 전체를 날리는 깡통 계좌가 속출한 이유는 지렛대 효과 때문이다.
작은 밑천으로 큰돈을 벌어보려는 투자자들이 ‘미수거래’를 시도한 탓이다. 작은 돈으로 큰 돈을 투자한 효과를 얻으려면 돈을 빌려 투자해야 한다.
국내에는 주식투자자가 갖고 있는 밑천보다 많게는 4배까지 돈을 빌려 투자할 수 있는 ‘미수’라는 제도가 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제도다. 이런 ‘빚 투자’ 때문에 주가가 폭락한 지난달 원금을 몽땅 날리는 투자자가 속출한 것.
미수거래가 특히 심한 곳은 주가지수 선물 및 옵션시장이다. 선물시장은 거래를 활성화하기 위해 원금의 7배나 되는 금액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해 준다. 1500만 원만 있으면 1억 원어치를 투자할 수 있다.
리슨 씨가 6000억 원을 날린 것도 ‘지렛대 효과’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주가지수선물 시장은 세계 5위, 옵션 시장은 세계 1위의 거래량을 자랑한다. 투자자들이 ‘대박’을 노려 선물과 옵션 시장에 몰리기 때문이다.
○투기가 판치는 한국 증시
한국 증시에서 미수거래가 유난히 인기를 끄는 것은 투기에 집착하는 투자자와 이를 부추기는 일부 증권사의 합작품이라는 지적이다.
투자자들은 장기투자를 통해 적정 수익을 얻는 것보다 ‘한 방에 큰 돈을 버는’ 미수거래와 선물 또는 옵션시장에 열광한다. 거래량이 많아질수록 수수료 수입이 증가하는 증권사들은 이를 방조한다.
미수로 주식을 사면 규정상 이틀 뒤 반드시 돈을 갚아야 한다. 대부분의 투자자는 미수로 산 주식을 당일 또는 이틀 뒤 팔아 돈을 갚는다. 이런 초단기 투자가 늘수록 주식시장의 안정성은 떨어지게 된다.
증권사들이 초(超)단타 거래를 주로 하는 선물투자자에게 다양한 혜택을 주며 선물이나 옵션거래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많다. 증권사들의 방관 속에 지난해 말 1조 원대이던 미수금 잔액은 지난달 20일 사상 최대인 3조 원에 육박했다.
○막을 방법이 없는 게 문제
투자자가 증권사 프로그램을 컴퓨터에 깔아 집이나 사무실에서 거래하는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이 발달하면서 위험이 큰 미수거래는 더욱 늘어나는 추세다.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고 거래할 수 있기 때문.
더 큰 문제는 지렛대 효과를 노린 미수거래의 부작용이 커지고 있는데도 막을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증권업협회는 증권사별 미수금이 얼마인지 파악하고 있지만 공개하지 않는다.
증권업협회 관계자는 “미수거래가 증권사의 주요 수입원이기 때문에 현황을 공개하려 하면 회원사들이 크게 반발한다”며 “규제의 필요성은 알고 있지만 증권사의 반대가 심해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화증권 최현재 연구원은 “미수거래 투자는 워낙 위험해 다양한 안전판을 갖춘 뒤 시도해야 하는 복잡한 투자기법”이라며 “개인투자자들이 대박을 노려 이 기법을 쓰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이완배 기자 roryre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