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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방형남]‘한반도版 메르켈’을 위하여

입력 | 2006-02-02 03:14:00


한 장의 사진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마주 앉아 있는 1월 16일자 모스크바발(發) 외신 사진이다. 동독 출신 독일 총리와 국가보안위원회(KGB) 간부로 동독에서 5년간 근무한 러시아 대통령의 만남. ‘역사의 아이러니’는 그런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일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더 그랬다. 메르켈은 푸틴의 약점을 집요하게 추궁했다. 푸틴이 서명한 비정부기구(NGO)법을 거론하며 “이 법이 NGO 활동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윽박질렀다. 점령국이던 러시아의 대통령이 몇 마디 해명을 하자 위성국 출신의 독일 총리는 “법이 발효된 후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주의 깊게 지켜본 뒤 다시 이 문제를 논의하자”고 못을 박았다.

러시아가 싫어하는 인권과 민주주의까지 거론한 메르켈은 주러 독일대사관에 러시아 NGO 대표들을 초청해 면담을 하기도 했다. 정서적으로 우위에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언행이다.

메르켈과 푸틴의 만남에 주목하는 이유는 장차 우리에게도 비슷한 일이 닥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이 통일되고, 북한 출신 인사가 통일 한국의 지도자가 되어 미국을 방문한다. 그가 미국 대통령을 만나 미국의 ‘비민주적 상황’에 대해 따끔한 충고를 한다. 가능한 상상이 아닌가.

몇몇 탈북자에게 물었더니 통일 한국 대통령을 뽑게 되면 북한 출신이 당선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선거에는 무조건 참가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북한 주민들이 북한 출신 후보에게 몰표를 던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남한에서 흔히 그렇듯 복수 후보가 출마하고, 독일의 경우처럼 남한 주민이 북한 주민을 무시하게 되면 승부는 더욱 쉬워질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메르켈’을 갖게 될까. 메르켈은 동독 치하에서였지만 서독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서독 TV를 시청하고, 서독의 친척들이 보내 준 청바지와 조끼를 입고, 비틀스의 노래를 들으며 성장했다. 서른두 살 때는 서독을 여행하며 “서독 모델이 분명히 옳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서독체제를 선택하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현재의 북한에서 ‘한반도판 메르켈’이 자라기를 기대하는 건 그야말로 연목구어(緣木求魚)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지난달 중국의 경제특구를 둘러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소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북한에 큰 변화가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달리 본다. 우리 국민만 해도 이미 장삼이사(張三李四)까지 중국을 경험했다. ‘인류가 낳은 절세의 위인’, ‘천출명장(天出名將)’이 뒤늦게 중국의 발전상을 보고 놀랐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다. 그런 북한이 변한들 얼마나 변할까.

북한은 당분간 근본적으로 변할 수 없다. 햇볕정책 Ⅰ과 Ⅱ가 계속되지만 북한의 변화는 김 위원장이 뒤늦게 중국을 방문하고 놀라는 게 고작이다.

길게 보아야 한다. 1941년생인 김 위원장은 올해 65세다. 그가 80세까지 산다고 쳐도 15년 뒤 북한에 필연적으로 크나큰 변화가 닥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한 장기 포석이 필요하다. 특정 세력이나 특정인을 위한 근시안적 대북정책은 혼란을 초래할 뿐이다.

유독 북한에만 할 말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히지 않고, 달라는 대로 주는 ‘평화번영정책’을 지속하는 건 2200만 명의 북한 주민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통일이 되면 폐기해야 할 쓰레기로 만드는 것이다.

메르켈 전기를 쓴 본대학 정치학 교수 게르트 랑구트 씨는 “동유럽과 서유럽을 모두 경험한 메르켈은 더 자유롭게, 새롭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래저래 독일의 메르켈이 부럽다.

방형남 편집국 부국장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