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대학가에서 ‘현대사 교과서’로까지 통했던 ‘해방 전후사(前後史)의 인식(해전사 인식)’을 비판적으로 재조명하는 책이 출간된다. 20여 명의 학자가 공동 집필해 8일 선보이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은 그동안 축적된 현대사 분야의 학문적 성과를 담고 있다.
1979년 출간된 ‘해전사 인식’은 서점가에선 ‘잊혀진 책’이지만 현실세계에는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젊은 시절 이 책을 통해 역사관을 형성한 386세대가 정치와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여권(與圈)과 운동권 일각에서는 ‘해방 후 남한 단독정권 수립으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으며 그래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실패한 역사다’라는 식으로 곧잘 말한다. 이는 ‘해전사 인식’ 속에 깔려 있는 좌파 민족주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현 정부와 여당이 추진한 ‘4대 입법’ 가운데 과거사 정리와 친일 청산, 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법 개정도 이런 역사 인식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친일 청산을 위해 역사를 다시 정리해야 하고, 북한을 적대시하는 국보법을 폐지해야 하며, 사학도 친일세력 및 지주계급과 연결돼 있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번에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을 펴내는 학자들은 ‘해전사 인식’이 편향성을 띠고 있으며 역사적 진실과도 상당 부분 다르다고 지적한다. 한 필자는 “‘해전사 인식’은 1970년대 후반 한국현대사 연구가 일천했을 때 쓰인 것”이라며 “이후 연구의 진척에 따라 내용에 많은 문제가 드러났는데도 386세대들이 아직까지 책 내용을 모두 사실인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새 책이 ‘해전사 인식’ 이후 20여 년간 이뤄진 연구 성과를 반영해 해방 전후사에 접근하고 있는 것은 역사 기술(記述)의 균형 회복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 과학적, 실증적 근거가 역사의 생명이다. 새 책은 ‘해전사 인식’이 미군정(美軍政)과 친일 청산에 대해서도 사실과 다른 주장을 담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역사 연구의 이런 진전이 국민의 역사 인식에도 반영돼야 한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 혼란도 극복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