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널 사랑해서 하는 말이야/데보라 태넌 지음·남재일 옮김/248쪽·1만 원·생각의 나무
“이 화장지통은 재활용이 가능하단 말이야!”
헬렌이 욕실에서 소리쳤다. 그녀는 결정적인 물증을 찾아낸 수사관처럼 쓰레기통에 버려진 화장지통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무엘이 맞받았다. “재활용할 수 있다는 거, 나도 알아. 그러니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내만큼은 아니었지만 사무엘 역시 재활용에 찬성하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이날 무심코 종이로 된 화장지통을 쓰레기통에 버리게 된 것이다. 그게 헬렌의 눈에 띌 줄이야.
사무엘은 볼멘소리를 했다. “일일이 쓰레기통을 뒤져 가면서까지 내가 뭘 버리는지 확인할 것까진 없잖아. 망가진 화장지통보다는 우리 관계가 더 중요해.”
헬렌이 중간에 말을 잘랐다. “나는 지금 우리 관계에 대해서가 아니라 재활용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늘 싸운다’(우크라이나 속담)고 했던가.
물론 가족은 소중하다. 우리는 가족에게서 위안을 찾는다. 외롭고 힘들어서 움츠러들 때 이 각박한 세상에 누가 있어 허기진 마음을 기댈 것인가. 하지만 ‘사랑의 우물’에서 길어 올렸다고 해서 물맛이 항상 단 것만은 아니다.
가족은 서로 아주 가깝기 때문에 보고 싶지 않은 어두운 면을 보게 된다. 누군가와 아주 오랫동안 함께 살게 되면 그 사람의 결점을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이다. 서로가 너무 친숙해서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가족 그 자체가 아이러니다!
이 책은 가족이라는 ‘사랑의 함정’,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그 지독한 진실을 다양한 예화를 통해 익살스럽게, 그러면서도 뼈아프게 일러 준다. 서로 살을 비비고 사는 보금자리가 어떻게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고 마는지 생생히 보여 준다.
많은 남성은 결혼 생활에서 가장 큰 불만이 뭐냐고 물으면 “아내가 성가시게 군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자들은 좀체 그런 불평을 하지 않는다. 왜?
“가끔은 아내가 말을 걸어 와도 대꾸를 안 합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어요. 얼마 전엔 함께 TV를 보는데, 자기 동생에게 무슨 직업이 적당하겠느냐고 불쑥 묻더군요. 마흔이 넘은 처남에게 무슨 충고를 하라는 거지요?”(50대 택시 운전사)
하지만 TV를 보면서도 대화를 원하는 게 여자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TV만 보고 있는 남편에게서 뭔가 결핍을 느끼는 거다. 아내가 고민거리를 꺼낸다고 해서 함께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털어놓으며 서로의 관계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으면 족하다.
그러니 부인이 이웃집 여자에 대해 험담을 한다고 해서 얼굴을 찌푸리지 말라. 그녀는 단지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럼, 앞으로 상종도 하지 마!” 이렇게 말하는 건 결코 현명한 게 아니다.
미국 조지타운대의 언어학과 교수이자 시인이기도 한 저자. 그는 줄곧 강조한다. “대화 속에 희망이 있다!”
그러나 말 속에는 불화의 씨앗이 깃들기 마련이다. 대화의 기술이 필요하다. 요령이 있어야 한다. 상대방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고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꽂힐 수 있다. 대화가 겉돌기 시작하면 불똥이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른다.
가족의 텃밭에선 사랑만 자라는 게 아니다. 도처에 지뢰가 널려 있다. 그러니 스페인 철학자의 경구를 두고두고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모든 말은 결핍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지 못한다. 모든 말은 과잉이다. 차마 전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들도 전하게 된다….”(호세 오르테가이가세트) 원제 ‘I Only Say This Because I Love You’(2001년).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