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자료 유출에 대한 사후 처리의 형평성이 문제되고 있다. 정치권을 통해 국가기밀이 유출될 경우 관련자 문책 등 사후 조치는 아예 이뤄지지 않거나 이뤄지더라도 문책의 정도가 약했다. 반면 본보가 ‘중장기 조세개혁 방안’ 보고서를 단독 입수해 보도한 것과 관련해 재정경제부는 보도가 나간 지 하루 만에 전격적으로 관리책임을 이유로 해당 부단장(국장급)을 보직 해임했다.》
▽정치권에는 고개 숙이고 언론 폭로에만 큰 칼=노무현(盧武鉉) 정부에서 각종 국가기밀 문서들이 정치인들에 의해 잇따라 공개됐다. 그때마다 정부는 ‘유출자를 반드시 가려내겠다’며 열을 올렸지만 정작 책임자가 가려져 문책을 당한 사례는 거의 없다.
올해 들어 열린우리당 최재천(崔載千) 의원은 정부가 지난해 말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 구상’(PSI)에 참여키로 결정한 사실과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관련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내부문건을 연거푸 폭로했다. 청와대는 즉각 민정수석실을 통해 색출 작업에 나섰지만 아직까지 성과를 내놓지 못하는 실정이다. 지난해 10월엔 민주노동당 권영길(權永吉) 의원이 한미 국방부가 작성한 ‘유엔사·한미연합사 작전계획 5027-04’를 공개해 논란이 됐지만 지금까지 ‘조사 중’이란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이렇다 할 조치 없이 마무리된 사례도 부지기수다. 민주노동당 강기갑(姜基甲), 노회찬(魯會燦) 의원과 한나라당 박진(朴振), 정문헌(鄭文憲) 의원도 국가기밀에 해당되는 문건이나 내용을 공개했지만 자료 출처에 대한 어떤 문책도 이뤄지지 않았다.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국가정보원 등에서 조사가 나왔지만 그 뒤 흐지부지됐다”면서 “원래 (정치인의 기밀문서 공개는) 그렇게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희생양이 필요했나=전격적인 문책에 대해 정부 내에선 최근 잇따라 터진 외교 안보문서 유출 사건과 증세 논란의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외교 국방 등 국가 안위와 직결된 국가기밀 유출에 대해선 솜방망이 처벌을 하면서 사전에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조세 문제를 언론이 먼저 포착해 쓴 것에 대해선 큰 칼을 들이댔기 때문이다.
특히 문제가 된 보고서는 관련 공청회에서 배포될 예정이었으므로 사실상 ‘반(半)공개 자료’였다. 중앙부처의 한 공무원은 “군사기밀 유출에는 뒷짐을 진 채 사실상 반공개된 자료 유출을 문제 삼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이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이번 조치가 5월 지방선거에서 악재가 될 수 있는 증세 논란을 조기에 차단하기 위한 강공책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아무튼 이번 조치는 청와대에도 적잖은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조세개혁 방안 보고서 유출과 관련해 재경부가 해당 부단장을 관리 소홀 책임으로 보직 해임함에 따라 3급 비밀인 NSC 회의록과 대외비인 국정상황실 보고문건 유출에 대해서도 그에 상응하는 문책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정부 비판 시각 용납 못하나=정부의 부동산대책에 비판적인 보고서를 낸 한국조세연구원 노영훈 연구위원이 사실상 연구 활동 중단의 징계를 받은 것도 다른 시각을 인정하지 않는 현 정부의 편협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예종석(芮鍾碩·경영학) 한양대 교수는 “국책 연구기관들이 정부 정책에 부합하는 논리만 개발하면 정책에 다양한 의견이 반영되지 못한다”며 국책 연구기관의 정책 비판 기능 상실을 우려했다.
일각에선 이 두 사람에 대한 징계가 세금과 부동산 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에 현 정부가 얼마나 민감한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는 해석도 나온다.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공무원들 “증세파동 희생양”
재정경제부는 7일 중장기 조세개혁방안 보고서 유출에 대한 관리 책임을 물어 윤영선 조세개혁 실무기획단 부단장을 보직 해임한 것에 대해 “조직 관리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자체 판단했다”며 외압설을 일축했다. 정부 정책홍보를 총괄하는 국정홍보처의 한 관계자도 “홍보처가 직접 개입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재경부의 이번 인사 조치가 청와대의 불편한 심기를 의식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끊이지 않는다. 보고서 보도로 청와대가 극도로 꺼리는 증세 논란에 다시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재경부가 청와대의 기류를 헤아려 강수(强手)를 뒀다는 얘기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신년연설에서 “양극화 해소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며 증세의 필요성을 시사했다가 25일 내외신 신년 기자회견에선 “당장 증세를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증세 논란 진화에 나섰다.
김병준(金秉準) 대통령정책실장도 지난달 박병원(朴炳元) 재경부 차관의 소주세율 인상 관련 발언에 대해 이례적으로 구두 경고했다.
이 때문에 보직 해임이란 강경한 처벌에는 여권 핵심의 의중이 담겨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이와 함께 비판 언론에 대한 청와대의 반감도 이번 인사 조치의 한 원인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동아일보의 잇따른 세제개편 방안 보도가 증세 논란으로 번져서 편치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관가에서는 이번 조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많다.
특히 직격탄을 맞은 재경부 공무원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재경부 관계자는 “재경부는 경제정책 협의 부처로 각종 정책 자료를 배포할 수밖에 없는 자리”라며 “유출은 항상 외부에서 이뤄지는데 징계는 재경부가 받는다면 누가 밤새워 일을 하려고 하겠느냐”고 흥분했다.
그러나 윤 부단장은 “내가 직접 보고서를 유출한 것은 아니지만 조직 논리라는 게 원래 그렇다”며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으니 부하 직원들이라도 추가 징계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박현진 기자 witness@donga.com
◆언론학계 “정부 감정적 대응” 비판
언론학계에선 본보가 보도한 ‘중장기 조세개혁방안’ 보고서 유출에 대한 ‘포괄적 책임’을 물어 재정경제부 담당 국장을 보직 해임한 데 대해 ‘언론 통제’라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유재천(劉載天)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특임교수는 “보고서 유출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가리지 않고 책임자를 징계했다면 지나친 조치”라며 “이런 일이 반복되면 결국 국민이 정부의 정책 수립 과정에 참여해 토의할 수 있는 기회를 봉쇄당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조세정책은 납세자인 국민의 이익과 직결되기 때문에 국민이 미리 그 내용을 파악해 토론할 기회를 갖도록 해야 하는데 이번 조치가 그 기회를 차단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공론의 장을 봉쇄하는 것은 곧 언론에 대한 통제”라고 못 박았다.
김우룡(金寓龍)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도 “정부가 정보 유출에 대한 책임을 물어 징계를 하는 데는 이론이 없지만 유출 경위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징계를 하는 것은 지나치게 감정적인 대응”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번 보직 해임 조치는 뉴스의 출처를 원천봉쇄하려는 정부의 의도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며 “공무원이 비판 언론에 기고하는 것을 막는 언론정책과 같은 맥락”이라고 지적했다.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