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 선물은 그들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브룩이 태어나기 전에 그 구절을 일기에 옮겨 놓고, 그것이 내가 아버지로서 항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에게는 의무가 있고, 어머니에게는 본능이 있다. 그러나 나는 초연한 아버지, 옆에 없는 아버지는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본문 중에서》
수민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한두 해 전쯤이었다. 자기 몫의 과자를 받아 들고는 불만스럽게 소리쳤다. “얄비가 너무 얇단 말이야!” 두꺼운 정도를 두께라고 표현한다면, 물질의 얄팍함을 얄비라고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어린 딸과는 그런 기상천외의 어휘를 즉석에서 만들어 가며 소통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키가 엄마보다 한 뼘 이상 커 버린 열일곱 살의 ‘꼬마’와 산뜻한 교류를 하기 위해선 제법 심오한 계획이 필요하다.
아마 이 책을 쓴 제프리 노먼도 비슷한 곤경에 처했던 모양이다. 딸에게 가르칠 기회가 확연히 줄어들어 보일 때, 아버지로서 충고하는 일만으로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느낄 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궁지에 몰린 저자가 떠올린 해결책의 하나는 뜻밖에 산이었다. 온갖 형태의 고민을 모조리 감싸 주겠다는 듯이, 산은 가끔 종교를 초월한 사원이기 때문이다.
딸이 훌쩍 자라 버린 걸 발견할 즈음 남자의 나이는 보통 쉰을 앞두고 있을 터이다. 흔히 세속에서 위기의 중년이라고 연민과 위로의 정을 보태어 불러 주는 연배다. 어떻게 보면 이것저것 겪어 볼 만큼 겪고, 돌아와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고 싶은 나이일 수도 있다. 딸이 있다면 그 기회는 의무처럼 강요되기도 한다. 그래서 짐짓 성찰에 잠긴다. 산에 왜 가느냐보다는 우리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이냐는 질문이 먼저다. 하지만 그 물음을 다른 사람에게 던지는 일은 불성실하다. 스스로 대답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에겐 나만의 대답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딸에게 품위 있는 제안을 할 수 있겠다. 함께 걸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서로 들려 주자는 것이다. 산으로 들어가면 산은 보이지 않는다. 특히 정상은 가까이 다가서기 전까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닮은 데가 많다. 일상의 나날에 푹 빠져서는 삶이 뭔지도 모르면서 떠들어 대기만 하지 않는가.
수민이와 함께 한라산을 올랐고, 또 한 번은 성인봉 정상을 넘었다. 부녀는 산꼭대기에 다다랐으며, 그 즉시 내려가야 한다는 정상의 가르침도 받았다. 그리고 산은 과거이자 미래란 사실을 눈치 챘다. 오르내린다고 다 알지는 못하지만, 자연이든 딸이든 아빠든 교감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미국에서 글을 쓰는 한 사내는 딸과 함께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 등정에 성공했다. 하지만 결코 뻐기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은 늙어 가고 딸은 자라 가는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장소와 높이만 다를 뿐, 우리의 경험과 같다. 가는 다리를 바르르 떨며 높은 산 오르기를 힘들어하는 수민이도, 내가 펼치고 있는 이 책의 제목을 보고는 웃었다. 딸의 웃음은 전쟁도 멈출 수 있다는 게 노먼의 주장이다. 더는 무릎에 앉힐 수 없게 된 나이의 딸아이와 대화하고 싶어 안달인 아버지들에게 이 책을 읽는 것 외에 무슨 방도가 있겠나 싶다.
차병직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