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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공감]책 읽고 情 나누는 ‘사랑방 도서관’

입력 | 2006-02-10 03:27:00

느티나무 어린이도서관은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제 집처럼 드나들고 서로 만나 이웃을 형성하는 열린 공간이다. 도서관에 모여 독서토론 모임을 갖는 엄마들. 김희경 기자


《눈부신 조명이 쏟아지는 방송사의 쇼 무대부터 서울 대학로 소극장의 허름한 백스테이지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글쓰기의 미래를 논하는 문인들의 저녁 모임에서 아이들과 부모의 웃음소리 왁자지껄한 동네 어린이 서점까지. 무대와 객석, 생산자와 향유자의 낡은 구분 틀을 깨고 문화가 만들어지는 현장의 숨소리를 생생하게 전하는 ‘현장+공감’를 신설합니다. ‘현장+공감’는 부정기적으로 게재됩니다.》

6년 전.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새로 조성된 경기 용인시 수지2지구에 이사 온 주부 김은정(38) 씨는 아는 사람도 없고 콘크리트 더미로 쌓아 올린 아파트 숲 안에서 자주 숨이 막혔다.

2006년. 김 씨는 이제 이곳을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 빗대 ‘수지 동막골’이라 부른다. “눈살 찌푸리며 경쟁하지 않는 어른, 자유로우면서 밝은 아이들이 함께 있는” 이곳이 그에게는 새로운 고향이다.

그동안 김 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변화의 핵심에는 ‘느티나무 어린이도서관’이 있다.

8일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2동 현대성우 아파트상가. 큰길에 접한 1층은 온통 부동산중개업소의 붉은 간판으로 뒤덮여 을씨년스럽다. 그러나 지하 1층 도서관으로 내려가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40평의 밝은 공간은 온돌 마루에 반원형이나 사각형의 책장이 아기자기하게 배치돼 있고 벽 한쪽에는 책 읽는 어린이를 위한 ‘책 읽는 그네’가 걸려 있다.

오전 10시가 되자 주부들이 모여들었다. 독서토론 모임 ‘산마음’ 회원들로 오자마자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청소한 뒤 온돌 마루에 앉아 ‘판타지 동화의 세계’라는 책을 함께 펼쳐들었다.

매주 열리는 엄마들의 독서 토론모임은 ‘산마음’ 말고도 ‘가마솥’ ‘달항아리’ 등 여럿이다. 지난해 이곳에서 ‘나를 찾아가는 글쓰기’ 강좌를 들은 주부 7명은 최근 ‘우리 마을 이야기’라는 책도 펴냈다.

이곳은 ‘어린이’ 도서관에 대한 고정관념을 기분 좋게 배반하는 ‘동네 사랑방’이다. 그림책을 슬라이드로 보여주는 이야기극장, 작가와의 만남, ‘아버지와 함께’ 강좌, 책 전시회 등 온갖 행사가 끊임없이 열린다. “책을 통해 이웃을 만나고 책에 담긴 지식을 공동체 삶으로 되살려내는 곳”(김은정 씨)이다.

엄마들은 각각 다른 동기로 이곳을 찾았다. 김 씨는 ‘1만 원만 내면 평생 책을 빌려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2002년 발을 들여놓았다가 대출 반납 도우미, 어머니독서회 등으로 활동을 넓혀간 경우다.

박현주(33) 씨는 “유치원에 다니기엔 아직 어린 아이들을 보낼 곳이 없어 놀이방 차원에서 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곳은 ‘떠드는 도서관’이다. 언제나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박 씨는 “다른 도서관에선 아이에게 조용히 하라고 계속 주의를 주는데 여기는 그렇지 않아 아이들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엄마들은 자녀 교육에 도움을 얻길 바라면서 몇몇씩 독서 모임을 꾸렸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며 새로운 것을 알게 됐다.

곽선진(36) 씨는 “공부를 하면서 내 아이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아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 또한 아이를 억누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아이 교육, 아파트 평수 등의 렌즈로 상대를 평가하는 시각도 바뀌었다. 방수미(37) 씨는 “친한 사이이면서도 서로를 재는 아줌마들의 태도가 싫었는데 여기서는 생각이 다르다고 전제하는 독서토론모임이라 그런지 의견 차이에 뒤따르는 감정적 앙금이 없고 서로를 누구 엄마 대신 한 인간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엄마가 꼭 움켜쥐고 있던 아이의 손을 서서히 놓아주기 시작하자 아이도 달라졌다. 김은정 씨는 “겁 많고 엄마만 찾던 아이가 ‘느티나무’에서 생기를 찾고 혼자 수영장에도 다녀오고 하는 걸 보면 내 아이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했다.

19일 개관 6년째를 맞는 이 도서관은 2000년 개관 당시 3000권에서 지금은 1만4000여 권의 책을 등록해 놓을 정도로 성장했다. 회원은 모두 1만2000여 명. 지난해 하루 평균 177권의 책이 대여됐다.

사재를 털어 도서관을 만든 박영숙 관장은 어린이 도서관은 문턱이 없는 공공재여야 한다는 생각에 회원 가입비로 받던 1만 원마저 지난해 없애버렸다. 운영비는 후원금으로 충당한다.

박 관장은 “어린이 도서관이 마을 사랑방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은 어린이를 중심으로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일 수 있기 때문”이라며 “삶 속에 숨 쉬는 도서관은 어린 아이를 업고 마음 놓고 드나들 수 있는,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