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보안사령관과 초대 해운항만청장을 지낸 강창성(姜昌成·사진) 전 국회의원이 14일 오후 9시 40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9세.
1927년 경기 포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육군사관학교 8기로 중앙정보학교장, 보병 5사단장 등을 지냈다. 1960년 육사 동기생들이 주도한 5·16군사정변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비영남 군맥으로는 드물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38세에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1973년 보안사령관 재직 때 ‘윤필용 장군 모반 음모’ 사건 수사를 맡아 훗날 신군부의 주축이 된 군내 사조직 ‘하나회’ 장교들을 조사하게 되면서 이들과 불편한 관계가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3관구사령관으로 좌천돼 군인으로서 재기하지 못한 채 1976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1980년 2월 당시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을 만나 “집권욕을 버리라”고 강하게 비판했다가 그해 7월 부정축재자로 몰려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 당시 몸무게가 25kg이나 빠졌고 후유증으로 당뇨병을 얻기도 했다.
1982년 가석방으로 출소했으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도쿄(東京)대에서 ‘군벌(軍閥)’ 연구에 몰두했다.
고인은 이를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의 군맥과 사조직 연구의 명저로 평가받는 ‘한국·일본 군벌정치사’를 썼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치권에 입문해 국회 12·12쿠데타 국정조사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신군부 단죄에 적극 나섰다. 그가 정치인으로 변신해 재기에 성공한 반면 1995년 신군부의 핵심이었던 전두환, 노태우(盧泰愚) 두 전직 대통령이 군사반란죄로 구속 수감되면서 그와 신군부 간의 20여년에 걸친 악연은 매듭이 지어졌다.
고인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바꿨고, 2000년 한나라당 총재권한대행을 지낸 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후진에게 길을 열어 주겠다”며 스스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고인은 고령임에도 국회의원으로서 뛰어난 활동을 벌여 각종 언론에 의해 우수 의원으로 꼽히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윤봉죽(75) 여사와 재형(49·국민대 교수) 규형(43·명지대 교수) 정현(51·예원학교 부장) 재연(47) 정민(45) 씨 등 2남 3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18일 오전 8시. 02-3010-2230
김정훈 기자 jng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