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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미래로 미래로]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입력 | 2006-02-21 03:03:00

日 3대 정원의 하나일본 3대 정원의 하나로 꼽히는 겐로쿠엔. 에도시대의 대표적 정원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3만5000평 규모의 이 정원은 가나자와 시 한복판에 있다. 겐로쿠엔은 새로 지어진 ‘21세기 미술관’과 잇닿아 명소로 더욱 각광받고 있다. 사진 제공 가나자와 시


《“한 바퀴 늦게 운동장을 돌다 보니 어느새 맨 앞을 달리고 있었다.” 일본 혼슈(本州)의 중심부 동해에 잇닿은 가나자와(金澤) 시. 인구 45만 명의 작은 도시지만 일본은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명성이 높은 이 도시의 오늘을 두고 시민들이 짐짓 자부심을 감추며 하는 말이다. 가나자와의 성공은 ‘역발상’의 발전 모델이다. 에도(江戶)시대 마에다 한(前田藩)의 중심지로 400년간 번성했던 이 도시는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근대화에서 소외되며 흔한 시골 마을로 퇴락하는 듯했다. 그러나 가나자와 시민들은 그 ‘느림’을 어느 도시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그들만의 강점으로 승화시켰다. 》

○ 전통산업을 도시의 경제 기반으로

가나자와의 첫출발은 ‘문화의 보존’이었다. 근대화가 가나자와를 비켜 간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기도 이 도시를 조준하지 않았다. 가나자와 시는 종전이 되자 마치 준비라도 했다는 듯 일본 전국에서 가장 먼저 문화재보존조례를 제정했다. 에도시대, 밤이면 게이샤들의 웃음소리가 흐드러져 게이샤거리로 불렸던 히가시차야(東茶屋) 거리는 일본 전통차와 지역의 특산물을 파는 거리로 재정비됐다. 옛 무사들이 활보하던 거리인 나가(長) 정 부케야시키(武家屋敷)도 다시 가꿨다.

보존은 단지 옛것을 되살리는 데 있지 않았다. 가나자와는 외부에서의 자본 유입에 목말라하는 다른 도시와는 달리 ‘내발(內發)적 발전’ 모델을 택했다. 외부의 자본에 기대기보다는 지역이 가진 제조, 유통, 서비스 등의 전통적 산업을 보존하고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경제적 효과를 지역 내에 남기기로 한 것이다.

가가유젠(加賀友禪·일본 전통 의복을 만드는 염색 옷감), 금박, 구다니(九谷)자기 등의 지역 전통산업이 시대에 맞게 다시 태어났다. 시는 전통 기술을 이어 갈 다음 세대를 육성하기 위해 시립 미술공예대학과 현립 기술고등학교를 세웠다. 우다쓰야마(卯辰山) 공예공방에서는 전통 장인들을 기르고 있다. 가나자와에는 인건비가 싼 중국으로 옮겨야 할 공장은 없다.

○ 문화가 일상으로 흐른다

新-舊의 조화
가나자와의 전통 찻집 거리 히가시차야. 에도시대 모습 그대로 붉은색 격자창이 보존된 2층짜리 건물 120여 채가 늘어서 있다(위). 가나자와의 미래상인 ‘21세기 미술관’은 전통과 어우러지는 현대식 건물로 개관 첫해인 2004년 157만 명의 관람객을 불러들였다. 사진 제공 이종호 교수·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

가나자와 시가 다음 단계로 추진한 것은 ‘문화의 생활화’였다. 시는 과시적인 문화시설을 만드는 대신 문화가 ‘일상’이 되도록 작은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시민들이 각종 예술 교육, 수련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배려하는 지원정책을 펼쳤다. 1996년 문을 연 ‘시민 예술촌’은 스스로 문화 활동의 주체가 되려는 시민들의 구심점이다.

가나자와는 이제 세 번째 단계인 ‘문화의 세계화’로 나아가려 한다. 1995년 발표된 ‘가나자와 세계 도시구상’이 그 청사진이다.

시는 ‘세계 도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가나자와를 컨벤션 도시로 만드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2005년 한 해 이 도시에서는 324건의 크고 작은 회의가 열려 8만 명의 외지인들이 찾아왔다. 가나자와 컨벤션 사무국의 책임자 니시다 데쓰지(西田哲次) 씨는 “컨벤션 산업은 잘 가꾸어진 자원이 있는 가나자와를 알리는 데 기여한다”고 그 중요성을 설명했다. 시는 국제회의가 열리면 1인당 1만2000엔(약 10만8000원)의 유치 지원비를 준다. 그래도 손해 보지 않는다는 계산 때문이다.

니시다 씨는 “컨벤션 참가자들은 1인당 평균 5만7000엔을 소비하기 때문에 지난해에도 100억 엔(약 900억 원) 규모의 경제적 파급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가나자와 시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 전통으로 남기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시는 2004년 10월 시청 옆 공원에 깔끔하고 투명한 원형의 ‘21세기 미술관’을 탄생시켰다. 세지마 가즈요(妹島和世) 씨가 설계한 이 미술관을 보기 위해 개관 첫해에만 이 도시 인구의 3배가 넘는 157만 명이 가나자와를 방문했다. 미술관은 가나자와의 전통적 명소인 겐로쿠엔(兼六園)이라는 아름다운 정원과 잇닿아 있다. 또 시민들이 쇼핑을 즐기고 이웃들을 만나는 가타(片) 정의 중요 상권과도 직접 연결된다.

‘발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장’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뜻도 모를 세계화로 자신들을 내던지려는 천박한 시대에 완만한 속도로 도도하게 삶의 질을 키워 나가며 그것을 지역의 발전과 세계화로 연결시키고 있는 가나자와는 그 점을 진정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가나자와=이종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시민 30%가 아마추어 예술가로 활동

가나자와 시민 3명 중 1명은 스스로를 “아마추어 문화 예술가”로 분류한다. 상당수 시민이 음악, 미술, 공연 동호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문화예술 활동의 중심에는 1996년 문을 연 ‘시민 예술촌’이 있다. 가나자와 시민이라면 누구나, 또 아무 때나 이용할 수 있도록 24시간 개방된 공간이다.

당초 이 예술촌은 1910년에 세워진 2만9000여 평 규모의 방직공장이었다. 가나자와 시가 대피소 용도로 사들여 시민의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탈바꿈시킨 것이다. 시설 이용률이 연간 65.3%에 총인원 기준으로 연간 20만 명이 찾는다니 ‘구색 맞추기’ 수준의 시설은 아닌 셈이다.

시민 예술촌 안에는 공연이 가능한 대형 홀이 3개 있고, 복도를 따라 용도에 맞는 다양한 크기의 연습실이 있다. 공장 건물의 분위기가 살아있으면서도 시민들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곳곳에 현대적 감각이 덧칠돼 있다.

하루 24시간 개방되는 이곳에서 시민들은 연극, 음악, 그림, 춤 등을 연습한다. 모두 자생적 모임이다. 이용료는 6시간 기준으로 방 규모에 따라 1000∼5000엔(약 9000∼4만5000원) 수준이다.

평일 오후 7시가 되자 일을 마친 시민들로 연습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방음설비가 돼 있는 한 연습실에서 2명의 직장인이 신나게 색소폰을 불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고 잠시 인터뷰를 청하자 “방해받고 싶지 않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옆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200여 평 규모의 대형 홀이 시끌벅적했다. 아마추어 록 밴드가 라이브 공연을 앞두고 ‘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밴드의 리더 시미즈 세이치(淸水誠一·41) 씨는 “한 달에 두세 번 단원들과 함께 이곳을 찾고 있다”며 “적은 비용으로 모든 것이 갖춰진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가난한 음악인에게 축복”이라고 말했다.

호시바 이치로(干場一郞) 예술촌장 보좌는 “예술촌 운영에 연간 2억 엔(약 18억 원) 정도의 세금이 쓰이지만 시민들은 ‘내가 커피 한 잔 덜 마시면 된다’며 이곳에 애정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가나자와=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