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경산수’ 소정 변관식이 평화로운 농촌 풍경을 소재로 그린 ‘춘경산수’(41×180cm·1968). 소정을 ‘금강산의 작가’에서 ‘한국적 이상향을 만들어낸 작가’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대규모 특별전이 덕수궁 미술관에서 5월 7일까지 열린다.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지금 덕수궁 미술관에는 봄빛이 가득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정 변관식(小亭卞寬植·1899∼1976)의 작고 30주기를 맞아 5월 7일까지 덕수궁 미술관 전관에 마련한 ‘소정, 길에서 무릉도원을 보다’전.
2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흐드러지게 핀 복사꽃에 둘러싸인 고즈넉한 시골 마을, 오순도순 처마를 맞댄 옛 농촌 풍경이 반겨준다.
‘전가춘색’ ‘춘경산수’ ‘무릉도원’ 등 제목부터 봄 내음을 담은 그림에서 꽃향기가 은은히 배어나오는 듯하다.》
이번 특별전은 근대 한국화의 개척자인 소정의 미공개작을 포함해 그가 평생에 걸쳐 그린 대표작 80여 점을 ‘길 떠나기’ ‘길을 묻다’ ‘무릉도원을 보다’ 등 3가지 주제로 나누어 보여준다.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시대를 살았던 소정은 전통을 이어받고, 다시 그 전통을 뛰어넘어 한국적인 미감과 독창적인 산수화풍을 창조해 냈다. 그의 후기작들이 전시된 ‘무릉도원을 보다’의 경우 명성 높은 금강산 그림과 더불어, 완숙한 기량으로 담아낸 농촌풍경과 도화풍경(桃花風景) 등 대작에서 거장의 품격과 숨결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기혜경 학예연구사는 “소정의 대표작들을 두루 망라해 선보이는, 다시 만나기 힘든 전시”라며 “이 전시를 통해 ‘금강산의 작가’로 알려진 소정을 ‘한국적 이상향에 대한 꿈을 완성한 작가’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자유로운 영혼의 ‘야인 화가’
소정의 대표작마다 낙관처럼 등장하는 노란 두루마기를 입은 ‘황포노인’ . 소정은 한 평생 ‘시대의 야인’으로 살았다. 체제의 불합리를 참지 못했고, 현실에 순응하는 대신 유랑과 비주류의 삶을 선택했다.
황해도에서 태어난 소정은 외조부인 소림 조석진(小琳 趙錫晋)의 지도 아래 전통적인 화법을 익혔다. 1920년대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에는 비(非)관변 작가의 길을 고수하며 30대를 방랑으로 보냈다. 광복 이후 국전 심사위원을 지내는 등 중견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으나, 1950년대 중반 국전의 비리를 지적하고 다시 야인생활로 돌아갔다. 소정이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과 더불어 근대 전통 산수화단의 양대 산맥으로 손꼽히면서도 생전에 다소 소외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환갑을 넘긴 뒤에도 새로운 화법을 개척한 소정에 대한 관심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는 관념적 산수화가 아니라, 우리 산천을 직접 답사하며 철저한 사생을 통해 근대의 산수화를 선보였다. 이를 ‘소정 양식’이라고 한다. 동양화 하면 ‘여백의 미’를 생각하지만 소정의 그림에는 빽빽하게 풍경이 들어차 있다. 개성 있는 구도에, 옅은 먹색을 바르고 그 위에 농도가 다른 먹색을 겹쳐 칠하는 적묵법을 바탕으로 한 그의 그림은 마치 표현주의를 연상하게 하는 강렬함이 특징이다(‘농촌의 만추’ 등). 금강산 그림에서는 먹과 구도를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한 화면에 여러 개의 시점을 담아 화면에 박진감을 주기도 한다.
● 다시 발견하는 소정
소정이 그려낸 거대한 산자락이나 금강산 계곡, 혹은 평범한 들판 사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머리에 갓 쓰고 노란색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들이 휘적휘적 걸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외금강 삼선암 추색’ ‘내금강 보덕굴’ ‘천태폭포’ 등). 마치 낙관처럼 소정의 대표작에 등장하는 ‘황포노인’들이다. 그림 속 노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이 바로 이상향일 수 있다는 소정의 생각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이번 전시에는 아껴가며 보고 싶은 그림들이 수두룩하다. ‘내금강 진주담’ ‘내금강 보덕굴’은 금강산 작가의 진면목을 확인시켜 준다. 농촌 풍경을 그린 ‘농촌의 만추’ ‘전가춘색’ 등과 미공개작 ‘설경’ 등은 먹과 붓의 사용이 높은 경지에 올랐음을 보여준다. 중앙화단에 처음 공개되는 ‘영도교’의 경우 소정이 근대적 도시의 산물을 그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마지막으로 보너스 한 가지. 2층 전시장 벽에 걸려 있는 바위와 폭포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림 안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음과 양을 상징하는 뜻에서 원래 한 쌍을 이룬 작품이지만 미술관 측이 ‘노골적인 메시지’를 완충하는 뜻에서 마주보는 벽에다 걸어놓았다. 입장료 일반 3000원. 02-2022-0600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