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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을 위한 책 20선]냉정과 열정사이 Rosso, Blu

입력 | 2006-02-22 02:59:00


《인간이란 잊으려 하면 할수록 잊지 못하는 동물이다. 망각에는 특별한 노력 따위는 필요도 없는 것이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새로운 일들 따윈, 거의 모두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잊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게 보통이다.

잠 못 드는 밤, 나는 사람을 그리워함과 애정을 혼돈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매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본문 중에서》

상대의 사랑 밸브가 열리기를 기대하며 청춘을 보내는 것은 차라리 행복하다. 상대의 사랑 건전지가 바닥나는 걸 지켜보는 것은 너무나 눈물겹다. 두 연인이 똑같은 양을 소비했다면 좋으련만, 보통 한쪽은 이미 다 써 버렸고 다른 쪽은 아직 넘쳐 나지 않는가. 여기 문제의 건전지를 ‘충전’하며 사는 연인이 있다.

스무 살의 아오이와 준세이는 도쿄에서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지지만 작은 오해로 헤어지고 만다. 그러나 그들은 ‘10년 후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가슴에 품고 살다가 결국, 재회한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꼭 만나게 된다는, 하늘의 도움 없이는 안 될 기적 같은 일. 천우신조(天佑神助)다.

‘늘 우리가 듣던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오면 나처럼 울고 싶은지’라고 묻는 김장훈의 노래처럼 음악은 멜로디만 남기는 것이 아니다. 연애(戀愛)가 추억만 남기는 게 아니듯, 도시 역시 공간으로서의 의미만 남기는 게 아니다.

준세이의 편지를 받는 순간 고급 아파트, 보석 가게, 도서관과 공원 등으로 평화롭고 완벽하던 아오이의 일상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기가 내 자리라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안심시켰던 아오이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잃어버린다. “사람이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다.”

아오이는 결국 완벽한 현재를 버리고 과거의 약속을 향해 피렌체행 기차를 탄다. 사랑의 인력(引力)은 그 어떤 힘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한 가지 이야기를 남녀의 시각에서 두 권으로 쓴 이 소설은 형식이 독특하다. 어느 한 권만으로도 독립된 완결 구조이지만, 두 권을 모두 읽어야 비로소 남녀 양측의 사랑 이야기가 완성된다. ‘기억’은 두 권의 책을 꿰뚫는 하나의 축이다. 기억의 분위기를 그려낸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는 청아하면서도 쓸쓸하다. 동사나 형용사로 문장을 종료하지 않고 명사로 끝내는 방식 또한 묘한 여운을 준다. 기억의 디테일을 집어낸 쓰지 히토나리의 문체는 선명하고 저돌적이다. 그려내는 것과 집어내는 것이 각자 다른 표현 방식이듯 여자의 시각에서 쓴 ‘Rosso’와 남자의 시각에서 쓴 ‘Blu’는 각각 독립적인 시점을 가지고 있다.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주인공의 심리를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는 것이 두 작품의 공통된 매력이다.

이 책이 연인들에게 던지는 교훈은 별게 아니다. 결국, ‘있을 때 잘하자’다. 모든 연인에게 아오이와 준세이 같은 천우신조가 일어날 거라고 믿는 건 지나친 순진함이다. 10년씩이나 서로를 그리워하며 현재를 살지 못하는 연인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답답하지 않은가. 그러니 지금 연애하는 이들이여, 근검절약의 미덕을 그대들의 사랑에까지 실천할 마음이라면 당장에 그만둬라. 미련은 미련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사랑할 때 너무 똑똑하게 군 사람의 몫이니….

장유정 뮤지컬 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