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긋불긋 태양열 주택… 그 자체로 명물‘햇볕 바라기’를 하는 프라이부르크 시 보방지구의 태양열 주택. 보방의 집들에는 30cm 이상 두께의 단열재가 사용됐다. 덕분에 혹한기를 제외하고는 석유 없이 햇빛만으로도 충분히 난방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태양열 집열판과 조화를 이룬 색색의 벽은 그 자체로 보방의 명물인 도시 디자인이다. 사진 제공 서현 교수
《“운전면허증도 없는 사람이 사는 집에 왜 주차장을 만들어야 합니까?”보방지구 주민인 크리스토프 보로스 씨는 이렇게 반문했다.
주민들의 이런 당황스럽지만 합리적인 질문이 오늘의 보방지구를 만든 원동력이다.
독일 남서부 프라이부르크의 미니 신도시인 보방지구.
이곳의 거리 풍경은 나른하다.
꼬마들이 탄 수레를 매단 자전거, 장애인이 탄 휠체어가 자동차 경적소리에 위협받지 않고 느릿한 속도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건물 옥상에 줄지어 선 태양열 집열판은 이 도시 특유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 주민 아이디어로 만든 자동차 없는 거리
"보행자가 먼저죠"
여느 유럽의 집들이라면 주차장이 있어야 할 집 앞 공간이 보방에서는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개들이 뛰어노는 평화로운 보행공간으로 변모했다. 시민들은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주차빌딩을 이용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사진 제공 서 현 교수
‘독일의 환경수도(首都)’로 널리 알려진 프라이부르크 시는 인구 20만 명 중 3만 명이 학생인 학원도시. 녹색당이 의회 다수를 점유하고 시장도 녹색당 소속이다. 보방지구는 그 프라이부르크 안에서도 보행자 중심의 거리 환경과 환경친화적 건물들로 새롭게 조명받는 곳이다.
독일 땅인데도 보방이라는 프랑스식 지명을 갖게 된 이유는 이곳이 프랑스군 주둔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줄곧 이곳에 머물렀던 프랑스군은 독일 통일과 함께 철수했다. 주택 부족으로 고심하던 프라이부르크 시는 프랑스군이 남긴 빈 땅을 사들여 신도시를 만들기로 했다. 도시 외곽을 확장하는 것보다는 도심 인근에 밀도가 높은 신도시를 만드는 것이 합리적이었던 것이다. 10만 평이 조금 넘는 면적에 5000명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미니 신도시 개발이 시작됐다.
보방과 여타 신도시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개발의 기본 아이디어가 입주민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보방 개발을 시작하며 시 정부는 몇몇 자원봉사자들이 구성해서 운영하던 ‘포럼 보방’이라는 시민단체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포럼 보방’은 시 정부의 주택국, 보방신도시조성위원회와 함께 도시 건설의 주요 축이 됐다.
‘포럼 보방’은 잠재적인 입주 대상자들을 찾아내 이들에게 바라는 도시의 모습을 물었다. 입주민들의 요구는 용적률을 높여 달라거나 자기 집 앞으로 길을 내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집 앞이 주차장 대신 아이들 놀이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것과 같은 소박하지만 구체적인 것이었다.
시는 집 면적에 비례해 강제로 주차장을 짓도록 한 조례를 개정했다. 첫 입주지역에 시범적으로 집집마다 주차장을 짓는 대신 공용의 주차빌딩 두 개를 지었다. 자동차를 가진 사람들은 집 앞에 주차장을 만드는 대신 이 주차빌딩의 주차공간을 사야 한다. 그 대신 주차장이 들어섰어야 했을 집 앞 마당은 화단과 놀이터가 됐다. 물론 집 앞에 자동차 진입을 완전히 금지하지는 않았다. 무거운 짐을 옮기거나 급한 용무가 있을 경우에는 잠시 주차를 허용한다. 간선 도로변에는 방문객을 위한 노상주차장도 마련되어 있다.
집 주위에서 자동차가 사라지고 환경이 안정되니 거리가 놀이터가 됐다. 보방지구에는 어린이를 키우는 입주민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시범지역에서 시작한 주차장 자유구역은 현재 보방 전체 면적의 4분의 3 정도로 늘어났다.
○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집
주민들의 또 다른 요구는 환경친화적인 집이었다. ‘포럼 보방’은 태양열 주택에 관한 자료를 집대성해 입주 예정자들에게 태양열 주택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알려주었다. 한국 집들의 벽체에 5cm 정도의 단열재가 사용되는 데 비해 보방신도시 주택에 들어간 단열재의 두께는 30cm가 넘는다. 태양열 집열판을 통해 혹한기를 제외하고는 외부에서의 별도 에너지 공급이 필요 없는 주택이 되었다.
시 정부는 거대 기업에 일괄적으로 토지를 공급하지 않았다. 밀도 높은 도시를 지향했던 만큼 단독주택을 짓겠다는 개인들에게 공급하지도 않았다. 작은 조합을 조성한 입주자들에게 토지를 공급하고 이들이 여러 건축가에게 설계를 의뢰하게 했다.
건축 경험이 없는 입주자들은 ‘포럼 보방’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따라 지켜야 할 것과 요구해야 할 것을 숙지하고 건축가와 대화를 해 나갔다. 그 결과 집의 규모는 일정하게 유지되지만 도시에는 다양한 모습의 건물들이 들어서게 됐다.
건물의 가로변 1층에 상업공간들이 유치되면서 굳이 입주자들이 차를 타고 외부로 쇼핑을 나갈 필요가 없어졌다. 거리에 보행자들이 많아지다 보니 장사도 잘되고 장사가 되다 보니 이 상업공간들이 자연스럽게 주민들의 모임 장소 역할도 하게 됐다.
주민 입주가 끝난 지금 ‘포럼 보방’은 해산했다. 그러나 입주과정에서의 적극적인 의견 표명은 입주민들에게 강한 자부심과 공동체 의식을 심어 줬다. ‘포럼 보방’의 안드레아스 베네스케 전 대표는 자랑스레 말한다. “물론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주 작은 발전도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라이부르크=서현 교수·한양대 건축학부
▼회원제 운영 ‘함께 타기’자가용이 필요 없어요▼
카 셰어링 협회 소속의 자동차. 예약할 때 받은 번호를 칩에 입력하면 키가 나와 이용할 수 있다. 보방에서는 어떤 집에서든 300m 이내에 이 카 셰어링 자동차가 주차돼 있다. 사진 제공 서현 교수
보방지구의 간선 도로변 주차장에는 흰색 승용차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외부에 카 셰어링(car sharing)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다. 차의 소유주는 카 셰어링 협회. 카 셰어링 회원이라면 누구든지 보방지구 곳곳에 주차된 스무 대의 이 흰 자동차를 사용할 수 있다.
자가용이 없는 집에서도 가끔 자동차가 필요할 경우가 있다. 하지만 자가용은 대개 하루의 20시간 이상 주차되어 있기 마련이다. 소유의 방식 외에 자동차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고민 끝에 나온 것이 카 셰어링 제도다. 1987년 스위스에서 시작돼 1988년 독일에 도입된 이 제도는 이미 독일 전역에 널리 퍼져 있다. 그중에서도 보방지구는 이 제도를 가장 활발하게 이용하는 곳으로 이름 높다.
민간회사에서 운영하는 이 제도는 회원들의 가입비와 자동차 이용료로 운영된다. 보방지구에 배정된 20대의 자동차들은 간선 도로변의 지정 노상주차장에 항상 세워져 있다. 회원들은 인터넷이나 전화를 통해 자동차 사용을 예약하고 이용번호를 받는다. 자동차 내부의 칩에 이용번호를 입력하면 자동차 키가 나온다. 물론 이용한 다음에는 원래 자리에 세워 놓아야 한다. 보방지구의 경우 집에서 최대 300m 이내에 자동차들이 있으니 굳이 자기 자동차를 가질 필요가 없다.
보방지구 카 셰어링 회원인 게오르크 그로세 씨는 사흘에 하루꼴로 이 자동차를 이용한다. 보방으로 이사 오면서 갖고 있던 차를 팔았다는 그는 “무엇보다도 초등학생 딸이 길에 나가 놀아도 차 조심하라는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즐겁다”고 자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