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통일부 장관이 그제 국회에서 전력(電力) 200만 kW 제공에 관한 ‘대북(對北) 중대 제안’을 변경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밝혔다. 지난해 6월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제시한 ‘중대 제안’은 북이 핵을 포기하고 경수로도 짓지 않는 것을 전제로 했으나 그 후 베이징 4차 6자회담에서 타결된 9·19 공동성명은 북이 핵을 포기하는 대신 언젠가는 경수로를 가질 가능성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상황 변화를 인정한 이 장관의 발언은 늦었지만 현실을 바로 본 것이다.
‘중대 제안’의 실효성(實效性)에 대해서는 그동안 줄곧 의문이 제기돼 왔다. 북이 1994년의 북-미 제네바 합의도 지키지 않은 마당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전력을 주겠다고 덜컥 약속한 것은 김 위원장 면담 대가이거나 또 한번의 ‘퍼주기’가 아니냐는 지적이 많았다. 더구나 9·19성명으로 자칫하면 전력도 주고, 경수로도 지어 줘야 하는 이중 부담의 우려도 커졌다.
문제는 북의 태도다. 제네바 합의에 따른 신포 경수로 건설사업은 이미 중단됐다. 이를 대체할 새 경수로에 대해 9·19성명엔 ‘핵을 포기하면 적절한 시점에 제공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고만 돼 있으나 북은 경수로부터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북의 트집으로 6자회담 재개가 계속 미뤄지면 북핵 문제 해결은 그만큼 늦어진다. 결국 북이 핵보유국이 되는 시간만 벌어 주는 셈이다.
중대 제안은 공연히 북의 기대만 키워 놓았을 뿐 문제 해결엔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 제안과 9·19성명을 ‘한국 외교의 지평을 넓히고, 북핵 문제 해결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확인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자찬했다.
처음부터 6자회담 진전과 신포 경수로 사업의 추이를 보고 중대 제안을 했더라면 8개월 만에 이를 변경하는 혼선은 빚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라도 ‘주도적 해결’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미국과의 긴밀한 공조를 통해 북핵과 에너지 지원 문제를 현실적으로 풀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