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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세상/허태균]‘콩깍지’ 씐 사람이 행복하다?

입력 | 2006-02-25 02:59:00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표현은 흔히 사랑에 빠진 사람의 비합리성이나 맹목성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너무나도 형편없어 보이는 이성을 사귀는 친구에게 객관적인 설득을 시도해 본 사람은 이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명백히 드러난 객관적인 사실을 보지 못하거나 다르게 해석할 때도 적용되는 표현이다. 황우석 교수 연구의 극단적인 지지자들이 노정혜 서울대 연구처장을 폭행한 사건은 명확한 사실이 부재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미 밝혀진 사실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는 ‘콩깍지’의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은 이성적인 존재이며 자신의 판단은 대부분 합리적인 사고 과정의 결과라고 믿는다. 20세기의 심리학을 포함한 사회과학의 주요 패러다임 또한 합리성이었다. 사람은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여서, 정확한 정보와 함께 충분한 동기와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사람의 행동과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들이 나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콩깍지’ 현상은 특정한 환경이나 요인으로 일어나는 실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제안하듯이, 21세기의 심리학은 인간을 그리 합리적인 존재로 간주하지 않는다. ‘콩깍지’는 특별한 실수나 오류가 아닌 일상으로 이해된다. 인간은 원래 합리성의 절대적 기준 자체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은 ‘긍정결과 검증 전략(positive-testing strategy)’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어진 정보를 최대한 사용하여 모든 가능성을 검증하기보다는, 주어진 정보를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내리거나 이미 가지고 있는 결론을 강화하려는 심리적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황 교수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의 논문 조작, 거짓말, 사생활과 관련된 어두운 소문 등에 귀 기울이는 반면, 황 교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의 업적, 전문성, 가능성과 관련된 긍정적 정보를 찾고 그것을 중시한다.

이러한 편향성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므로 뇌신경 기제와 같은 구조적 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의 사고나 판단에 대해서는 신경사회심리학의 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아직까지는 정서와 동기에 연구의 초점이 맞춰져 있는 수준이다.

편향성은 특히 그 판단이 자신과 깊이 관련되어 있을수록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강하게 휘어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회적으로 더욱 위험한 것은 모든 ‘판단’이 ‘모든 진실’을 알지는 못하는 상황에서 내려지지만, 그 판단을 한 개인에게는 진실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자신의 눈에 씐 ‘콩깍지’는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불확실성이 일으키는 견해차가 상대에게 거짓말과 음모, 고집으로 보이고, 미움과 갈등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심리적 과정엔 나름대로의 기능이 있다는 진화사회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편향성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만약 인간이 합리성에만 근거해서 판단한다면 세상의 몇 쌍이나 결혼할 수 있을까? 당연히 많은 후손을 남겨 번성할 기회가 줄어들 것이다. 또 공식 세계 랭킹이 31위인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이 월드컵에서 16강, 8강, 4강에 진출하리라는 기대와 믿음이 가능할까? 이 같은 측면에서 건강한 사람들이 우울증 환자에 비해 편향성이 크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콩깍지’는 사람의 행복에 반드시 필요한 일상적 착각인 것 같다. 다만 자신의 눈에 지나치게 두꺼운 콩깍지가 씌어 있지는 않은지 가끔 거울을 보는 지혜가 필요할 뿐이다.

허태균 고려대 교수·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