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에는 창고에 보관 중이던 시가 10억 원 상당의 책(2.5t 트럭 11대 분량)을 98만원만 받고 폐지업자에게 넘겼지요. 학술 출판이란 게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거지 어디 돈벌려고 하는 건가요.” 21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소명출판 사무실에서 만난 박성모(43) 대표는 이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소명출판은 지난해 50여 종의 학술 책을 출간했다.
1997년 출판사를 시작한 이래 연간 최대 규모다.》
‘근대중국의 언어와 역사’ ‘창조와 폐허를 가로지르다’ ‘루쉰과 저우쭈런’ ‘언어 횡단적 실천’ ‘반일과 동아시아’ ‘근대 네이션과 표상들’ ‘이상문학전집’ ‘탈식민주의를 넘어서’….
제목만 봐도 눈치 채겠지만 대중이 쉽게 집어들 것 같지 않은 묵직한 책들이다. 특히 지난해 11월부터 최근까지 무려 40여 종을 쏟아냈다. 이런 불황 속에서 어떻게 이런 학술 책만 낼 수 있었을까.
“사실 지난해에는 출판사 운영이 너무 힘들어 문을 닫으려 했어요. 그런데 ‘소명이 문 닫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학계의 격려도 있었고, 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에 12권이나 선정되면서 숨통이 트여 그동안 미뤄왔던 책을 한꺼번에 낸 거죠.”
비슷한 시기 40여 권의 학술서를 쏟아낸 또 다른 출판사가 있다. 서울 마포구 마포동의 도서출판 선인이다.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 독재 형성사’ ‘박정희 시대의 쟁점과 과제’ ‘러일전쟁과 동북아의 변화’ ‘한말제천의병연구’….
1993년 희귀 근현대사 자료집 전문출판사로 출발한 선인은 1999년부터 학술 단행본을 냈다. 한해 평균 30종을 넘지 않았으나 지난해엔 50여 종을 냈다.
“학계 풍토가 확실히 ‘깊게’에서 ‘넓게’로 이동하면서 자료를 꼼꼼히 읽는 분도 적어졌습니다. 그래서 학술 단행본 출판에 뛰어들었지만 그저 1쇄를 소화하면 손해 보지 않을 정도지요. 최근 책을 많이 낸 것은 저희가 근현대사 분야에 어느 정도 특화가 이뤄지면서 좋은 원고를 가져오시는 학자 분이 많아진 때문입니다.”
선인의 윤관백(46) 대표가 말하는 1쇄는 대략 700부. 재작년까지만 해도 1000부씩 찍었는데 타산이 안 맞아 줄였다. 2쇄를 찍는 것도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학술서적은 아무리 많아야 1200부를 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두 출판사가 돈이 안 되는 책을 꾸준히 내는 이유는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랴’는 사명감 반, ‘정신적 기간산업에 종사한다’는 자부심 반이다. 두 출판사 대표가 바라는 학술서적 지원책도 입을 맞춘 듯 같았다.
“학술 출판의 시장 자생력이 없다는 것은 명백해졌습니다. 현재 문화관광부(매년 250여 종)와 학술원(매년 380여 종)에서 운영 중인 우수학술도서 지원제도를 확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출판사들을 두루 안배해 배분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경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옥석을 가려 차별 분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