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겐하임 미술관 앞 산책로. 네르비온 강물을 미술관의 일부로 끌어들이기 위해 산책로의 좌우를 잇는 보행자 전용 구름다리를 만든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거미’라는 이름이 붙은 거대한 조각 밑을 통과하는 것도 구겐하임 미술관을 찾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사진 제공 이영범 교수
《스페인 북부 바스크지방 비스카야의 주도(州都)인 빌바오는 ‘미술관 신화’를 만든 도시다. 1997년 가을 개관 이래 2005년 말까지 800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간 구겐하임 미술관이 그 신화의 주인공. 미술관 하나만으로 인구 40만 명의 작은 도시가 뉴욕, 파리 못잖은 브랜드파워를 갖게 됐다.
신화의 시작은 ‘쇠락’이었다. 이 도시의 경제를 이끌던 철강과 조선산업이 1980년대 이후 급격한 사양의 길로 접어들면서 빌바오는 위기에 빠졌다. 도시를 가로질러 비스케이 만(灣) 으로 흘러드는 네르비온 강 주변의 항만과 공업지대는 슬럼이 되어 갔다.》
그러나 빌바오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변화는 도시 중심에 인접한 아반도이바라 지역에서 시작됐다. 11만 평에 이르는 이 지역의 항만, 창고와 화물철도역이 구겐하임 미술관이 건설되고 컨벤션홀과 음악당이 들어서는 문화지구가 됐다. 20년 전 철광석을 실은 배들이 빽빽이 오르내리던 강은 이제 휴식공간으로 시민들의 차지가 됐다.
○시민에게 되돌려진 네르비온 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가장 눈여겨볼 점은 미술관 그 자체의 명성보다 미술관 가는 길이 즐겁다는 것이다. 강 건너편 주택가의 시민들은 금속공예 작품 같은 백색의 ‘페드로 아루페’ 다리를 건너 미술관으로 간다. 아반도이바라 동쪽 옛 도심에 사는 시민들은 3km에 이르는 산책로를 따라 걷거나 조깅을 하면서 혹은 자전거를 타고 미술관으로 온다.
시는 시민들의 미술관 가는 길이 즐거워야 한다는 것을 구겐하임 미술관을 건설할 때부터 구상했다. 제 아무리 빼어난 건축물이라 하더라도 시민들이 찾기 어렵다면 ‘죽은 공간’이 되고 만다는 판단이었다. 그 근저에는 도시의 주체는 시민이지 관광객일 수 없다는 의식이 깔려 있었다. 미술관과 시가 함께 윈윈 하기 위해서는 네르비온 강과 그 주변을 살려야 했다. 좀 더 편리한 이동을 위해 강의 북쪽과 남쪽을 잇는 2개의 보행자 전용다리가 생겼다. 전철이 강변을 따라 운행되기 시작했다.
빌바오 시민들이 자랑하는 구겐하임 미술관 옆의 어린이 놀이터. 요즘 빌바오 시민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곳은 2005년 조성된 미술관 옆 놀이터다. 500평 규모의 이 놀이터는 큰 아이들과 작은 아이들이 연령대에 따라 놀 수 있는 기구가 따로 마련돼 있다. 놀이터가 좋아서 14개월 된 딸을 데리고 주말마다 구겐하임 미술관을 찾는다는 이곳 토박이 사비어 엑사니스 변호사는 “빌바오가 구겐하임 미술관만의 도시는 아니잖아요”라고 반문했다.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미술관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동안 미술관 옆 놀이터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아반도이바라 지역의 공원화 비율은 70%를 넘는다.
○개발 수익은 시민들을 위한 공원과 산책로로
도시 곳곳에서 벌어지는 변화의 현장에서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팻말은 바로 ‘빌바오 리아 2000(Bilbao Ria 2000)’이다. 1992년 스페인 중앙정부와 바스크 주 정부가 절반씩 투자해 세운 이 개발공사(公社)는 공공부문이 소유하고 있는 도시의 버려진 땅을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 내는 실행조직이다.
빌바오의 도시 재편은 이 기관의 출발과 함께 시작됐다. 이 공사는 버려진 공공부문 소유의 땅을 호텔이나 주택단지로 개발해 민간에 분양한다. 분양으로 생기는 수익금은 대부분 재개발 지역 주민들을 위한 공원이나 시민운동장을 조성하는 데 쓰이고 강변을 잇는 다리를 만들거나 전철을 건설하는 비용으로 사용한다.
세계 어느 도시에서든 공공 공간의 확보와 삶의 질 향상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과연 이 일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에 대해 빌바오는 명쾌한 해답과 실천 사례를 제시한다. 민간기업과 협력해 도시 개발의 장기 마스터플랜을 제시하는 한편 지금 당장 도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을 마련하는 실천적 행동자로 활동하는 것이다.
“도시의 공공부문도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빌바오 리아 2000의 홍보담당 이사 카를로스 고로스티자 씨는 자신 있게 말한다. 정부나 지자체는 더는 예산만을 탓하며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30개 公-私기업 합심 ‘도시재생 비전’ 연구
빌바오 성공 신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빌바오 메트로폴리 30’이다. ‘빌바오 리아 2000’이 재개발사업을 직접 실행하는 공공기관이라면 ‘빌바오 메트로폴리 30’은 빌바오의 도시 재생과 관련된 장기적 비전과 전략을 수립하는 싱크탱크다. 1991년 결성된 ‘빌바오 메트로폴리 30’은 바스크 지역의 130여 개 공기업과 민간기업으로 구성된 민관협력체다. 여기에는 서로 이해관계가 얽히거나 반목하는 시 정부, 은행, 대학, 정유회사, 철강회사, 철도공사, 건설회사, 그리고 미술관과 항공사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 조직에는 800여 명의 학자와 전문가가 소속돼 있다.
도시개발 과정에서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이해관계는 늘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빌바오 메트로폴리 30’을 이끄는 알폰소 마르티네스 세에라 사무총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사회적 비전이 장기적으로는 민간부문의 이익과 합치한다”고 말했다. 시의 공공영역과 민간부문이 서로 합의하는 궁극적인 근거는 시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질 향상 없이 도시의 미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합의하에 탄생한 것이 지금 빌바오 시민들이 휴식공간으로 즐거이 찾는 네르비온 강가의 공원과 산책로 미술관 음악당이다.
빌바오=이영범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