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잘 벌이는 사람과 잘 마무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벌이는 쪽 같다. 대통령은 25일 취임 3주년에 국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크고 작은 일들이 빛바랜 흑백 영화처럼 지나간다”고 했다. 왜 ‘눈부신 천연색 영화’가 못 됐는가. 많은 일을 벌였지만 ‘불임(不妊)’ 끝에 퇴색했기 때문 아닐까.
편지에는 또 “대다수 국민이 저와 참여정부에 불만과 반대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고 쓰여 있다. 대통령이 꺼낸 어젠다들이 ‘요란한 시작, 초라한 결말’로 명멸(明滅)한 탓이 크다.
숱한 대선 공약 중에 ‘성장과 일자리’ 약속만이라도 지켰더라면 편지에 이런 문구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벌써 3년이 됐나 하는 분들도 계실 테지만, 아직도 2년이나 남았나 하는 분들이 더 계시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본다.”
‘성장과 일자리’를 위해서는 기업들의 국내 투자를 촉진하는 정책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기업 하기 좋은 나라’보다 ‘공무원 하기 좋은 나라’를 택했다.
경제계 한 인사는 정부만능주의를 한탄했다. “기업도시는 정부 실패의 대표적 사례다. 기업들의 애로는 풀어주지 않으면서 기업도시를 정해, 가라고 떠밀면 누가 가겠는가. 중국이 코앞처럼 가까이 있는데…. 차라리 규제권한을 지방자치단체에 다 넘겨줘 보라. 지자체끼리 규제완화 경쟁을 벌이게 될 거고, 기업들은 정부가 말려도 지방으로 갈 거다.”
기업들이 투자에 매력을 느낄 여건을 조성했더라면 투자 증가, 일자리 창출, 소비 회복의 선(善)순환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랬다면 정부가 말하는 양극화, 정확히 말하면 빈곤층 확대를 상당히 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은 편지에서 “경제는 경제 논리로 풀어야 한다, 여론이 경제를 살리지는 않는다고 정책 참모들과 경제 장관들에게 누누이 강조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부동산 대책을 ‘노무현 대(對) 강남’ 전쟁으로 국민에게 어필하는 것은 경제 논리가 아니다.
정부는 ‘완벽한 부동산 대책’을 자랑했지만 결과는 의도를 비웃었다. 3년간 아파트 값은 시가총액 기준으로 200조 원 올랐다. 지난해 8·31부동산 종합대책 이후 올해 1월까지 5개월에만도 서울 강남 집값은 2.14% 상승해 전국 평균(1.04%)의 두 배를 넘었다. 반면 지난해 건설업의 경제 성장 기여도는 ‘제로’였다. 일자리도 그만큼 사라졌다. 빈대도 못 잡고 초가삼간 태운 꼴이다.
‘균형’을 지상명제(至上命題) 삼아 지역 개발을 남발하는 바람에 전국 땅값도 폭등했다. 3년 사이 공시지가 기준으로 821조 원이나 뛰었다. 기업들은 값싼 땅을 찾아 해외로 더 나가게 됐다. ‘국내 투자 부진→일자리 부족’ 때문에 경제적 탈락자가 늘어난 데 겹쳐 부동산 자산(資産) 격차도 더 벌어져 버렸다.
이처럼 빈부 격차의 주요 원인이 ‘정부의 실패’에 있는데도 정부는 ‘시장의 실패’ 때문이라고 우기면서 무리한 개입을 강화해 악순환을 빚고 있다. 작년에는 ‘동반 성장’과 ‘선진 한국’이 노무현 어젠다였다. 하지만 세계적 경험에서 배우려 하지 않았고, 각계의 합의를 이끌어 내려는 노력이 없었다. 그러니 국민도 잠시 떠들고 마는 레토릭(수사·修辭)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제 대통령은 “양극화 해소가 최우선”이라고 새 어젠다를 강조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시한폭탄”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양극화가 심각한지부터 이견이 있다. 세계적 신용평가회사 무디스의 토머스 번 부사장은 “한국의 분배 수준은 국제적으로 볼 때 좋은 편”이라고 평가한다.
2004년 세계은행이 조사한 소득불균형 지표 ‘지니계수’를 보면 한국은 세계 127개국 가운데 27번째로 양호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같은 선진국이 오히려 불균형이 심하다. 평등을 체제이념으로 삼는 중국의 불균형이 한국은 물론이고 서방 선진국보다도 심하다.
대통령은 편지에 쓴 것처럼 진짜로 ‘경제 논리’를 수용하고 ‘작은 정부, 큰 시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양극화와의 전쟁’도 머지않아 빛바랜 흑백 영화처럼 지나가고 말 것이다. 대통령은 “선거는 부분적으로 국민을 속이는 게임”이라고 했지만 양극화 문제를 게임용으로 쓴다면 벌 받을 거다.
배인준 논설실장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