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청진기를 들고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의 이미지가 바뀌고 있다. 진료 결과를 토대로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내놓는 ‘연구하는 의사’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1990년대부터 국내외 학회 논문을 통해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해외에서 논문 성과를 내지 못하면 국내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요즘의 추세다. 1970, 80년대 의사들이 해외의 선진 의료기술을 익히기 바빴던 것에 비하면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이 같은 변화의 중심에 40대가 서 있다. 기나긴 수련기간을 거쳐 의사로서 첫발을 내디딘 지 5∼15년 되는 연령층이다. 본보 의학팀은 대학병원급 42개에서 의료계의 뉴파워그룹을 추천받았다. 》
○ 국제적인 임상연구를 우리 손으로
지난해 백혈병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국인 환자들이 임상시험에 참여하기 위해 내한했다. 의정부성모병원 혈액내과 김동욱(金東煜·46) 교수가 백혈병 치료제인 ‘슈퍼글리벡’의 국제임상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풍부한 임상치료 경험을 인정받아 다국적 제약회사 노바티스사의 신약 슈퍼글리벡의 임상시험을 주관하는 의사로 선정됐다. 현재 다국적 제약회사인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퀴브(BMS)사의 ‘다사티닙’(울트라 글리벡) 임상시험도 김 교수 주관으로 진행 중이다.
그는 1995년 10월 국내 최초로 백혈병 환자의 타인(他人) 간 골수 이식에 성공했다. 또 2001년엔 ‘기적의 항암제’로 불리는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을 가장 먼저 도입해 치료를 시작했다.
김 교수는 “슈퍼글리벡과 관련해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500명 이상의 환자 검체를 분석한다”며 “제약회사가 1인당 2000만 원이 넘는 비용을 투자하므로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국제유전성위암공동연구체 한국 대표인 서울대 의대 소화기외과 양한광(梁漢光·46) 교수는 유전성 위암에 대한 국제연구를 진행 중이다.
‘위암 수술의 대가’ 고 김진복(金鎭福) 서울대 의대 교수의 사위이기도 한 그는 대를 이어 매년 1000건이 넘는 위암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또 2000년 건립된 암연구소를 통해 매년 10여 편의 논문을 해외학회에 발표하고 있다. 한양대 의대 배상철(裵祥哲·47) 교수는 국내 최초로 루푸스 질환에 대한 조혈모세포 이식에 성공한 주인공. 세계적인 전문가 30여 명이 진행하는 루푸스 환자 임상연구 모임에 동양권에서 유일하게 참여하고 있다.
항생제 내성 연구의 권위자인 삼성서울병원 감염내과 송재훈(宋在焄·48) 교수는 아시아 최초의 국제 공동 연구기구인 ‘항생제 내성 감시를 위한 아시아 연합’ 창설을 주도해 현재 14개국 22개 도시 33개 병원이 참여하는 아태지역 최대의 연구조직으로 키웠다. 이 단체는 유럽 항생제 내성 감시기구 및 미국 항생제 내성 감시시스템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송 교수는 “폐렴의 가장 흔한 원인균인 폐렴구균의 항생제 내성은 아시아 국가들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며 “더 많은 아시아 국가의 참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 국내파의 활약
지난해 9월 일본 고베(神戶)에서 열린 심장중재술학회. 심장질환 전문가 3000명이 전남대 순환기 내과 정명호(丁明鎬·48) 교수의 심장동맥 스텐트 시술을 인터넷 생중계로 보고 있었다. 정 교수가 개발한 스텐트는 기존 제품의 부작용을 절반 이상 줄인 것으로 시술이 끝난 뒤 박수갈채와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그는 ‘약물 부착 스텐트’를 개발하기 위해 1000마리 이상 돼지를 대상으로 동물실험을 했다. 정 교수의 집엔 돼지 인형만 1000여 개나 있다. 연구실엔 돼지 16마리를 키울 수 있는 사육장도 마련돼 있다. 그는 매일 돼지하고만 살았다. 이런 노력 끝에 국내 처음으로 미국 유럽 일본 등 세계 주요 4대 심장학회 전문의 자격증도 취득했다.
국내 순수 기술로 신장암 관련 수술기구를 만든 연세대 의대 비뇨기과 나군호(羅君鎬·40) 교수. 로봇을 이용한 최소절개와 복강경으로 비뇨기암과 신장암, 신장질환을 치료하는 전문가다.
순수 국내파인 그는 2002년 미국 명문 의대인 존스홉킨스대 비뇨기과의 아시아권 첫 교수로 채용되기도 했다. 신장이식 시 환자 부담을 최소화한 수술기구를 양승철(梁承哲·57) 연세대 의대 교수와 함께 개발해 국제 특허 2개를 획득한 실력을 국제무대가 인정한 것.
로봇시술에 대한 보급과 기술 전수를 위해 2003년 그는 세브란스병원에 복귀했다.
전문가들은 “한국 의료계가 세계적 연구의 메카가 되기 위해서는 의료진의 수준 향상과 함께 의료 인프라 구축을 위한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연세대 의대 부학장인 김동수(金東洙) 소아과 교수는 “최근 각 대학이 특성화 과정을 통해 젊은 학생들이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고 있다”며 “이를 통해 의대생들이 시야를 넓혀 세계무대로 뛰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女의사 약진
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여의사들이 지난달 24일 서울 일민미술관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김경희 과장, 임필빈 원장, 이은정 과장. 김재명 기자
4년 전 서울 소재 유명한 의대를 수석 졸업한 여학생이 인턴과정을 다른 병원으로 지원해 화제가 됐다. 다니던 의대에서 성형외과를 지원했지만 ‘여자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사이 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대한의사협회에 따르면 올해 신규 면허를 발급받은 의사 3488명 가운데 여성이 1299명으로 전체의 37.2%를 차지한다. 2004년 27.7%, 2005년 31.9%로 급상승 추세다.
지난달 28일 ‘2006년도 신규 의사면허 수여 및 선서식’에서 새내기 의사들이 하얀색 가운을 입고 의사윤리 선서를 하고 있다. 이번에 면허를 발급받은 의사 3488명 가운데 여성은 전체의 37.2%를 차지했다. 김미옥 기자
올해 가톨릭대 의대에서 뽑은 인턴 267명 중 여성이 51%(136명)를 차지했다. 여성 인턴이 남성을 초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여성에게 진입 장벽이 높았던 비뇨기과, 성형외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등 수술 중심 과목에 여성 지원자가 늘고 있다.
이 중 비뇨기과는 남성 전유물로 알려졌지만 이젠 3명의 여성 전문의가 배출돼 활동을 하고 있다. 9명의 비뇨기과 여의사가 병원에서 수련을 받고 있다.
3명의 전문의는 이화여대 비뇨기과 윤하나(36) 교수와 연세우노비뇨기과 임필빈(任必彬·34) 원장, 서울 동부시립병원 비뇨기과 김경희(金俓希·36) 과장이다.
이들 모두 비뇨기과에서 남녀 생식기를 보며 남성들과 똑같은 수련을 받고 당당하게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김 과장은 “인구 절반이 여성인 만큼 비뇨기과 분야에서도 여의사가 필요했다”며 “요실금이나 방광염 등이 대표적인 질환”이라고 말했다.
특히 임 원장은 남녀 성 문제에 관한 영역을 개척 중이다. 일반 여성의 성교통(性交痛) 장애와 남성 성기능 장애 등을 진료하고 있다.
임 원장은 “남자들과 경쟁하며 일하기엔 여건이 여전히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그래서 지난 1년간 미국에서 골반장애와 이로 인한 성교통 장애와 배뇨장애를 공부하고 왔다”고 말했다.
여성 외과 의사들은 5년 전 외과여자의사회를 만들어 친목을 다지고 있다.
서울 대항병원 대장항문 전문 이은정(李T貞·36) 과장은 “예전에 여자가 외과를 한다는 것은 힘들 뿐 아니라 비전이 없다고 봤다”며 “그러나 이제 대부분의 여성 치질 환자는 여의사에게 진료받길 원한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