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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정은령]딸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

입력 | 2006-03-04 03:06:00


집에는 나 혼자였다. 벨 소리에 문을 여니 낯선 아저씨가 서 있었다. 월부 책 장수라며 불쑥 현관으로 들어선 아저씨는 재미있는 책을 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적막한 집 안을 휘 둘러보던 아저씨가 갑자기 착한 아이 같다며 나를 안았다. 소리를 질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겨우 “엄마 지금 오세요. 엄마가 앞집에…”라고 둘러댔던가. 머뭇거리던 아저씨는 집 밖으로 나갔다.

30년 전의 옛일이다. 그러나 아저씨가 나를 안았을 때의 그 진저리쳐지던 느낌은 지금도 선연하다.

그 나쁜 체험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여중 여고시절 교실에선 가끔씩 등굣길 버스 안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만졌다며 가방을 내던진 채 우는 아이들이 있었다. 예쁜 아이든 그렇지 않든 얼굴을 감춘 그 ‘손들’은 대상을 구분하지 않았다. 간혹 그 손의 임자를 찾아내 항의를 해 본 당찬 친구들은 “양복도 입고, 너무 멀쩡하게 생긴 보통사람이었어”라며 놀라곤 했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쯤은 겪었을 이 ‘나쁜 체험’의 특징은 당한 사람이 오히려 발을 뻗고 자지 못한다는 데 있다.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끼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빚어지는 데는 성적 괴롭힘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깔려 있다. 특히 어른들 사이에서 벌어진 성적인 괴롭힘은 “남녀 사이의 일”로 얼렁뚱땅 치부되기 일쑤다. 면식이라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성적 괴롭힘의 문제가 발생하면 주변 사람들은 “실수인데 이해 좀 하지”라고 사태를 무마하기에 바빠진다. 서로 민망하지 않으냐는 것이다.

수습기자 시절 경찰서에서 읽은 성폭력 피해자의 조서에는 “기분이 어땠나요?”라는 경찰의 질문이 있었다. 넋이 반쯤 나간 상태의 피해자가 답해야 하는 그 질문이 화간(和姦)인가 강간(强姦)인가를 가리는 하나의 요식임을 알았을 때 든 생각은 ‘몽둥이로 맞았더라면 매 맞을 때의 기분을 물었을까’라는 것이었다. 성폭력이 아닌 성추행조차 주먹이나 흉기로 누군가를 때리고 베는 일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공감하지 못하는가 보다.

성적인 괴롭힘을 폭력이 아닌 충동이 빚은 실수나 이해심의 문제로 몰고 가는 정서가 남아있는 한, 가해자는 자신의 잘못을 모른 채 “운이 나빴다”고만 생각하게 된다. 폭력이 ‘그럴 수도 있는 일’이 되어 버리면 나나 내 가족이 잠재적인 피해자나 가해자가 될 가능성은 그만큼 커진다.

연일 쏟아지는 성추행, 성폭력 사건은 과연 우리 사회가 마음 놓고 살 만한 곳인가를 되묻게 한다. 성적 괴롭힘을 없애 나가는 것은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 아이와 어른 모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훼손당하거나 훼손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을 만드는 것이다.

무망해 보이는 과제지만 그 실행은 단순하다. “싫어”라는 상대의 목소리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남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폭력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내 옆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떤 변명에도 그 폭력을 눈감아 주지 않는 감시자가 되는 것이다.

내 딸이 내가 겪은 두려움을 겪지 않고 살아갈 세상을 위해, 나는 이 폭력에 반대한다.

정은령 문화부 차장 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