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청계산에 오른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과 두 아들 상현(왼쪽) 대현 씨. 두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산행을 통해 인생을 배웠다고 한다. 변영욱 기자
《아버지는 ‘호탕’하다. 육십 평생 산을 오른 그. 말에는 거침이 없고 눈가엔 당당함이 묻어난다.
호연지기(浩然之氣).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하얀 이마엔 일가를 이룬 세월이 담겨 있다.
아들은 ‘젠틀’하다. 기억도 없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산을 탔다. 산사나이 아버지보다 한 발짝 늦긴 해도 뒤처지진 않는다. 편안한 웃음. 아버지를 통해 산을 알았고, 산을 통해 아버지가 사는 법을 배운다.》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청계산 자락.
대한산악연맹의 이인정(61·태인 대표이사) 회장과 아들 대현(32·한국디자인진흥원) 상현(29·대학원생) 씨. 오랜만에 함께 산에 오른 세 부자의 눈빛이 정답다. “자기들이 알아서 잘 커줬지. 나야 한 게 있나”라던 이 회장. 손길은 산을 오르는 아들들의 옷깃을 여미었다.
“이래라 저래라 말씀이 많으신 편은 아니에요. 오히려 농 비슷한 말씀이 많죠. 다만 산을 오를 땐 매사에 주의하고 자연 앞에선 항상 겸허하게 행동하라고 얘기하세요. 강요나 지시보다 스스로 깨우치길 바라시는 편이세요.”(상현 씨)
이 회장에게 산은 모든 것을 함께한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서울 종로구 누상동에서 자란 그에게 인근 인왕산은 놀이터였고, 커가면서 산을 타는 것은 밥을 먹는 것과 같았다.
1980년 등반가들에겐 ‘영혼의 땅’으로 통하는 네팔 히말라야 산맥의 마나슬루를 한국인 최초로 오른 것도, 이화여대 산악부였던 아내 구혜정(LG그룹 창업주 구태회 명예회장의 차녀) 씨를 만난 것도 이 회장에게는 산의 순리와도 같았다.
그런 이 회장이 아들에게 산을 가르친 것은 당연지사. 틈날 때마다 아들의 손을 잡고 산을 올랐다. “산에서는 더운 여름에 올라도 기온이 뚝 떨어지는 겨울의 추위를 느낄 때도 있고, 반대로 겨울에 올라도 여름을 만날 때도 있다. 세상의 이치가 모두 그렇다. 자연과 세상을 함께 배울 수 있는 곳이 바로 산이다.”(이 회장)
두 아들에게 함께 산을 가르쳤지만 깨우치는 방식은 달랐다. 큰아들 대현 씨는 산을 통해 ‘사람과 만나는 법’을 배웠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 미국에서 10년 동안 미술공부를 한 대현 씨. 월 400달러짜리 지하 셋방에서도 살아 봤지만 아버지가 가르쳐 준 산은 만리타향에서도 의지가 됐다.
“조용한 성격이라 사람을 쉽게 사귀지 못해 외로움도 많이 탔습니다. 그때 어린 시절 아버지와 등산하던 기억이 나더군요. 뉴욕 한인산악회에 가입해 교포 2, 3세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많은 사람을 사귀었습니다. ‘산을 통해 맺은 인연치고 악연 없다’는 아버지 말씀이 그대로 통했습니다.”
둘째 상현 씨에게 산은 인생의 교육장이었다. 그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는 사람들이 산에 쓰레기를 많이 버려 빈병이 많았다. 등산 때마다 덩치보다 큰 배낭을 준비한 상현 씨. 한가득 빈병을 주워 담고 내려와 자연도 보호하고 용돈도 벌었다. “지금도 정치나 기업 경영에 관심이 많은데 그때부터 싹이 보였다”고 이 회장은 술회했다.
상현 씨는 한양대 재학 시절인 2004년 비운동권 최초로 총학생회장에 당선돼 화제가 됐다. “당시 전국 대학생 자전거 국토순례단 총단장을 맡아 금강산에도 다녀왔습니다. ‘자연을 통해 이념을 넘어보자’는 그때의 목표는 늘 아버지가 산을 대하던 마음에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지난해 여름 세 부자는 함께 네팔에 다녀왔다. 정상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함께한 세 부자의 산행. 이제 자주 함께 오르진 못해도 여전히 산을 타는 행동으로 인생을 가르치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을 두 아들은 바쁜 와중에도 기꺼이 따랐다.
“산을 오르며 힘든 적이 왜 없었겠습니까. 동료를 산에 묻는 가슴 아픈 일도 많았죠. 그 고난이 우리 세대를 키웠습니다. 자식들이 자신만 편한 길을 가며 살지 않기 바랍니다. 함께 어려움도 이겨내면서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깨치는 것.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저도 아들들도 배우는 학생입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산을 통한 자연 교육▼
○ 아이들에게 등산은 어른이 됐을 때 인생의 거름이 된다. 혼자 걷고 뛸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스스로 한 발씩 헤치고 나가며 정상에 오르는 법을 깨쳐야 한다.
○ 아이들과 등산할 때는 정상에 오르려고 무리하지 말라.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 자신을 돌보고 안전하게 산행하는 ‘기다림’을 배워야 한다.
○ 아이들의 걸음에 속도를 맞춰라. 어른의 걸음으로 산을 오르면 오히려 아이들은 등산에 대한 나쁜 기억을 갖는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의 눈 높이에서 바라봐야지 어른의 입장에서 강요해선 안 된다.
○ 부모가 먼저 산행 안전 교육을 받고, 산에 가서 아 이들에게 가르쳐라. 매사에 준비하는 습관을 길러 줄 수 있고, 요행을 바라지 않는 정직한 자연의 순 리도 배울 수 있다. 위험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에게 신뢰도 심어 준다.
○ 시간이 날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 가까운 산이나 자연을 찾아라. 자연을 통해 사랑과 협동심을 배우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산에서의 캠핑은 가족 간의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된다.
○ 산을 오르며 많은 대화를 나눠라. 자연은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고 아이를 진실하게 만든다. 어느 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상이 얼마나 달라 지는가도 깨닫게 해 줘라.
○ 아이들 스스로 길을 찾게 하라. 부모는 미리 등산 루트를 익혀야 한다. 길을 잘못 찾았을 땐 돌아오 는 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도움말=한국등산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