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 80년대는 ‘팝송의 시대’였다.
당시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는 젊은이들에게 최신 팝을 접하는 창구였다.
허름한 상점에는 이른바 ‘백판’(복사 LP판의 속어)이 가득했다. 미국 원판을 불법으로 복사한 탓에 흑백 표지에 잡음도 많았다.
하지만 이들 백판을 판매하는 상점은 언제나 ‘만원사례’였다. 기존의 음반에 비해 50% 이상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 더. 미국의 빌보드차트는 최신 팝 음악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매체였다. 1950년대 중반부터 음반 판매량과 방송 횟수 등을 매주 종합해 팝송의 인기 순위를 선정함으로써 공신력을 인정받았다.
팝 마니아들은 무료로 배부하는 종이 한 장짜리 빌보드차트를 얻기 위해 매주 레코드점에 들르곤 했다.
빌보드차트 음반이나 곡명 옆에는 눈길을 끄는 도형이 등장한다. ‘●’와 ‘▲’이 그것이다. ●는 골드, ▲은 플래티넘으로 각각 50만 장과 100만 장 이상을 판매한 것을 의미한다.
반면 국내 가요시장은 음반 유통이 주먹구구식이어서 음반이 얼마나 판매됐는지 알 수 없었다. 공중파 TV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 역시 방송사의 자체 판단이 적지 않게 개입해 공신력을 잃고 있었다.
한국이 음반 판매의 공신력을 얻게 된 것은 1995년 3월 10일 가수 김건모가 발표한 3집 ‘잘못된 만남’이 200만 장을 돌파하면서부터다. 이 음반은 그해 한국 기네스북에 최다 판매 앨범(연말 기준 256만 장)으로 공식 인정받았다.
김건모는 1992년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로 데뷔해 2집 레게풍의 ‘핑계’로 스타가 됐다.
3집 타이틀곡 ‘잘못된 만남’은 속도감 넘치는 댄스 비트와 김건모의 걸출한 가창력이 조화를 이루며 국민가요가 됐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들어 음반 집계는 큰 의미가 없어졌다. LP반이 CD 때문에 밀려난 데 이어 MP3(음악 등 각종 오디오용 데이터를 저장한 컴퓨터 파일)의 등장으로 CD판매가 급감했다.
요즘 가요계 관계자들은 “음반이 10만 장만 팔려도 대박”이라고 푸념할 정도다. 머잖아 음반이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기도 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LP와 CD가 차례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잡음이 살아 있는 LP판만의 인간적인 매력을 ‘MP3 세대’가 과연 알고 있을까.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