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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쾌! 强者의 망가진 모습 ‘굴욕’에 웃는다

입력 | 2006-03-11 03:09:00

이치로의 굴욕5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일전에서 볼을 몸에 맞은 일본 국가대표 스즈키 이치로의 모습. 경기 후 인터넷에선 이치로의 아파하는 모습과 배영수의 미소 짓는 사진을 합친 ‘이치로의 굴욕’이란 제목의 패러디 사진이 유행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한국이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5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일전 이후 누리꾼들의 화제는 단연 ‘이치로의 굴욕’이었다. 이는 한국팀에 패한 후 “굴욕스럽다”고 심경을 토로한 일본 국가대표 스즈키 이치로(33)의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7회말 공격에서 한국 투수 배영수(삼성 라이온즈)의 공에 맞고 허리를 젖히며 괴성을 지르는 이치로의 사진과 미안한 듯 웃고 있는 배영수의 사진을 대비시켜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든 패러디다.》

○ ○○ 씨의 굴욕, 새로운 유머 코드

요즘 젊은이들이 자주 사용하는 ‘굴욕’이란 단어는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사전적인 의미(남에게 억눌리어 업신여김을 받는 모욕)가 아니다. 민망한 처지에 빠진 유명인들의 돌발 상황 사진을 찾아 내 ‘○○ 씨의 굴욕’이라고 이름 붙이는 일종의 유머놀이에 ‘굴욕’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고 있다.

‘카노사의 굴욕’(1076년 주교 서임권을 둘러싼 황제와 교황의 싸움에서 교황이 승리한 사건)에서 따온 이 ‘굴욕’ 시리즈는 주로 유명 인사가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어 뜻하지 않은 ‘소외’를 겪는 장면을 찍은 사진에 유머러스한 사진설명을 다는 식이다.

‘굴욕’ 시리즈의 원조로는 ‘케즈만의 굴욕’이 꼽힌다. 네덜란드 축구팀 에인트호번에서 4년간 122경기에 출장하며 105골을 기록한 마테야 케즈만이 지난해 11월 방한해 서울 용산전자상가를 걷는데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상황을 한 누리꾼이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올린 것.

누가 볼라…
경기장에서 유니폼을 정리하기 위해 바지를 내린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된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

이 밖에 최근 인터넷에서 인기 있는 굴욕 시리즈로는 ‘김종국의 굴욕’(눈이 큰 다른 가수 사이에 김종국이 서 있는 모습), ‘실바의 굴욕’(세계적인 이종격투기 챔피언 반다레이 실바가 방한했을 때 나이트클럽에서 팬 미팅을 가진 것), ‘박중훈의 굴욕’(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1인 시위에 나섰지만 몰려드는 팬들은 없고 순간적으로 얼굴을 찌푸린 모습), ‘김사랑의 굴욕’(팬 10여 명과 귤, 콜라를 놓고 소박하게 생일잔치를 벌이는 장면) 등이 있다.

굴욕 시리즈 사진을 관통하는 도식은 ‘상식의 반전’이다. 유명인이 등장하면 군중이 당연히 관심을 보이리라 생각하지만→상식과 달리 스타만 소외되고→유명인의 이런 뜻하지 않은 좌절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것이다. 대학생 김인표(26) 씨는 “유명인들이 겪는 무관심이 대중에게 오히려 통쾌감을 주는 게 굴욕 유머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 스타 권력을 ‘희화화’한다

눈이 작아…
눈 큰 동료 옆에 있는 가수 김종국(위에서부터) 등 누리꾼들은 뜻하지 않은 상황에 맞닥뜨린 스타들의 모습에 기발한 사진 설명을 붙여 ‘굴욕’이라는 유머 코드로 활용한다. 누리꾼들이 인터넷에 올린 사진들이다.

굴욕 시리즈는 인터넷이 낳은 패러디 문화의 새로운 형태로 평가받는다. 굴욕 시리즈 유머가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사진을 합성하던 기존 패러디와 달리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대학생 김광휘(26) 씨는 “그동안 유행했던 사진 합성 패러디는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준다”며 “굴욕 시리즈는 실제 상황 자체가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더 폭발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굴욕 시리즈의 주인공은 주로 가수, 연기자, 스포츠 스타 등이며 정치인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젊은 누리꾼들의 정치적 무관심 △부와 명예를 누리는 연예인 스타 권력에 대한 반감 등을 원인으로 꼽았다.

문화평론가 김지룡 씨는 “최고 권력자를 조롱할 때 가장 통쾌해지는 것이 패러디의 속성”이라며 “굴욕 시리즈의 주인공이 대중스타라는 점은 젊은 누리꾼들이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계층이라고 생각해 희화화하고 싶어 하는 대상이 정치인이 아니라 연예인 등 스타라는 점을 반증하는 현상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