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아내와 대화하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아내는 100원짜리 동전에 누가 새겨진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신, 좀 무신경한 줄은 알았지만 매일 사용하는 동전에 누가 새겨져 있는지도 모르다니 심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런데 아내는 퍽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누가 일일이 100원짜리 동전에 누가 새겨졌는지 보고 사용하느냐는 것. 오히려 100원짜리 동전에 누가 새겨져 있는지 아는 내가 더 이상하다고 반박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부부의 100원짜리 동전에 대한 질문 순례가 시작됐다. 동네에서 외식을 하고 나오며 음식점의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었다. “100원짜리 동전에 누가 새겨진 줄 아세요?”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새가 날아가는 거 아닌가요?”라고 말한다. “그건 500원짜리지요.” 아내의 얼굴에 득의만만한 미소가 번졌고 나는 “허, 세상에!” 하며 공허한 웃음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비디오대여점에 테이프를 돌려주며 주인아저씨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그분은 “글쎄요. 세종대왕인가요?”라며 자신 없이 대답한다. “그건 1만 원짜리죠”라며 100원짜리 동전을 보여 주기까지 해도 “이 양반이 누구래?”라며 누군지를 몰랐다.
아내는 거 보라며 기세등등해졌고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비디오가게 옆의 문방구점에 들러 물건을 사며 같은 질문을 했다. 주인 부부 모두 누가 새겨진 줄을 모르고 있는 것 아닌가. 자신만만해진 아내는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이 집으로 오는 길에 휴대전화로 여기저기 전화까지 하며 나의 상식이 비상식임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100원짜리 동전에 새겨진 인물은 이순신 장군이다. 아마 군복 차림이 아니어서 기억 못 한 분이 많았던 것 같다.
평소에 똑같은 사물이나 사건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볼 수밖에 없다며 사람들의 관점의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특히 현대사회처럼 다양한 가치관과 이해관계가 공존하는 시대에는 자신의 의견을 절대화해서는 안 되며 다원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누구보다 강조하던 나 자신이 무색해졌다. 적어도 내가 상식이라고 알고 있던 것 중 상당 부분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하게 된 것이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보면 이런 저런 일로 결석하는 학생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신이 발표를 맡은 시간에 빠지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때는 몰라도 자신이 발표를 맡은 날에는 수업에 늦지 않도록 어느 때보다도 긴장하고 준비해야 하며 겹치는 일이 생겨도 웬만하면 뒤로 미뤄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은 너무도 당연해서 필자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평소에는 성실하게 출석할 수 있어도 자신이 발표를 맡은 날에는 ‘발표 불안 때문에’ 도저히 못 나오는 학생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사람에 대한 나의 이해의 폭이 조금 더 넓어지게 되었다.
자신에게는 너무도 자명해서 상식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얼마 전에 유럽의 언론에 실린 이슬람교의 선지자 마호메트 풍자만화로 인해 이슬람 국가 곳곳에서 성난 시위가 일어나 유혈사태까지 갔다. 이것은 서방세계 사람들과 이슬람세계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한 사람 혹은 한 집단의 상식이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집단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불어 사이좋게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생각을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친구에게 들은 말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맺고 싶다.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겠습니다.’
김정호 덕성여대 교수·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