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 디자인 전문회사 ‘IDEO’의 제품 디자이너 성정기(36·사진) 씨의 명함은 한 장이 아니다.
자그마치 10장이 한 세트로 구성돼 있다. 이 명함에는 전화번호뿐 아니라 그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그려져 있어 ‘휴대용 포트폴리오’ 역할을 한다. 디자이너라면 본받을 만한 멋진 아이디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작품들이 모두 국내외 유명 공모전 수상작이라는 것.
그는 2001년 ‘LG전자 국제 디자인 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은 뒤 ‘LG생활건강’ ‘소니 코리아 디자인 공모전’ ‘iF 디자인 어워드’ ‘브라운 국제 디자인 공모전’ ‘오퍼스 국제 디자인 어워드’ 등 국내외 굵직한 공모전에서 주요 상을 받았다.
그는 흔한 어학연수 한번 가지 않은 순수 국내파(국민대 공업디자인과 졸업)다. 하지만 지난해 디자이너에게 ‘꿈의 공간’으로 불리는 IDEO의 문턱을 넘었다.
IDEO는 그가 디자인한 작품을 자료 형태로 만들어 제출한 포트폴리오에 대해 “이런 것은 받아 본 적이 없으며 매우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IDEO에는 매주 150∼170여 명의 지원자가 밀려든다. 이곳에서 그는 포트폴리오만으로 입사한 특별한 케이스다. ‘영어가 짧다’는 단점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국내 대기업 디자인실에 근무하던 그가 IDEO에 도전한 것은 이 회사의 공동 창업자 빌 모그리지 씨의 영향이 컸다. 모그리지 씨는 영화 ‘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드처럼 그에게 꿈을 키워 준 존재였다.
현재 그는 보스턴 IDEO 사무실에서 ‘알콘’ ‘타깃’ ‘존슨 앤드 존슨’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e메일을 통해 “언젠가 모그리지 씨와 한 직장에서 일하겠다는 오랜 꿈을 이뤘다”며 “내게 디자인은 꿈을 현실로 바꿔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 씨는 무심코 넘겨 버리기 쉬운 일상의 작은 실수에서 디자인 아이디어를 이끌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LG생활건강 디자인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샴푸 용기 디자인은 눈을 감고 머리를 감다가 샴푸와 린스를 구별하지 못해 실수한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그는 특히 시각장애인의 불편을 감안해 손으로 느껴 구분할 수 있도록 샴푸와 린스 용기에 다른 형태의 홈을 넣었다. 브라운 국제 디자인 공모전에서 상을 받은 카트는 무거운 짐을 카트에 실어 나르다 타고 놀았던 기억을 떠올린 것. 일과 놀이를 결합한 발상이었다.
독일의 iF 디자인 어워드 수상작 ‘이스틱(e-stick)’은 어떤가? 공원에서 몸이 불편한 노인들을 지켜 보다 지팡이에 휴대전화나 내비게이션 등 정보기기를 결합시켰다.
전은경 월간 ‘디자인’ 기자 lilith@desig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