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게임 '리니지'의 대규모 명의도용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는 리니지 게임운영업체인 엔씨소프트가 중국에서 대량으로 게임 계정을 만들어 접속한 사실을 알고도 이를 제대로 차단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수사 중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한국 리니지 게임에 가입할 수 없지만, 한국에선 게임 아이템이 거래되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한국 리니지 게임에 가입하려는 중국인들이 적지 않다.
경찰은 13일 "엔씨소프트가 명의 도용을 묵인하거나 방조했다면 형법상 '부작위에 의한 방조'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면서 "엔씨소프트를 상대로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명의 도용을 막지 않은 게임업체에 방조 혐의를 적용한 사례는 없다.
▽게임업체의 방조?=경찰에 따르면 리니지의 신규 회원은 지난해 9월 이전까지 매월 8만~12만 명 가량이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이후 신규 회원이 급격히 증가해 12월에는 51만여 명이 가입했다.
경찰은 "엔씨소프트가 신규 회원 현황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중국에서 대량으로 사이트에 접속한 사실을 알았다"고 밝혔다.
경찰은 "중국에서 국내 인터넷 망을 경유해 사이트에 접속할 경우 이를 차단하거나 1개 인터넷 주소(IP)로 등록할 수 있는 계정 수를 제한하면 대규모 명의도용 사태를 막을 수 있다"며 "엔씨소프트는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현재 개인정보 도용 피해자 9000여 명이 엔씨소프트를 상대로 1인당 100만 원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집단 손해배상 소송을 추진하고 있어 경찰에서 이 업체의 방조 혐의가 드러날 경우 큰 파장이 예상된다.
▽얼마나 도용됐나=지난해 10월부터 올해 2월까지 중국인 게이머에 의해 명의가 도용된 한국인은 최소 98만여 명, 최대 122만여 명인 것으로 경찰 조사에서 드러났다.
이들 계정을 등록한 e메일이 모두 7개다. 이 가운데 6개가 중국 통신사의 e메일인 것으로 확인됐다.
중국 게이머들은 국내 초중고교 등 교육기관 41곳과 군청 교육청 등 공공기관 7곳, 일반 기업 161곳 등 모두 270여 곳의 사이트를 해킹해 리니지 사이트의 중간 경유지로 활용했다.
이들은 또 중고차 매매업체인 M사의 사이트를 해킹해 3000여 명의 개인정보를 빼냈다.
하지만 이미 중국과 대만 등 외국 유명 인터넷 게임 사이트와 포털 사이트에 한국인 수천여 명의 개인정보가 공개돼 있는데다(본보 2월 16일자 A1, 10면 참조) 중국 여행사로부터도 개인정보를 구할 수 있어 명의도용을 목적으로 한 해킹은 많지 않았다고 경찰은 밝혔다.
▽중국 게이머와의 전쟁=중국에는 리니지 게임 아이템을 판매하는 게이머는 4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엔씨소프트는 경찰의 요청에 따라 지난해 9월 5일 중국 게이머가 명의를 도용한 리니지 게임 계정 12만 개를 폐쇄했다. 중국 게이머들은 수입원이 봉쇄됐다는 의미로 이 일을 '9·5 봉호(封戶)사건'이라고 부른다.
경찰의 수사로 계정 17만 개가 13일 추가 폐쇄됐다.
경찰 관계자는 "중국 게이머들이 다시 대규모 명의도용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명의도용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게임 계정 간 아이템 이동을 금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리니지의 사이버 머니인 '아덴'을 포함한 게임 아이템 매매시장은 올해 1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재명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