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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우 칼럼]이병주의 ‘쥘부채’

입력 | 2006-03-18 03:06:00


14년 전 타계(他界)한 소설가 이병주 선생의 기념사업회가 내달 출범하고,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소설가 이문열 씨, 정구영 전 검찰총장 등 한국사회의 대표적 진보 보수 인사들이 함께 참여한다는 본보 기사(3월 13일자)를 읽는데 문득 그의 소설 ‘쥘부채’가 떠올랐다. 삼십오륙 년 전에 읽었던 소설의 제목이 선명하게 떠오르다니. 그것은 작은 경이(驚異)였다.

집안의 묵은 책들을 뒤졌으나 ‘쥘부채’는 없었다. 서점에 간다 해도 쉽사리 찾을 것 같지 않았다. ‘이병주 전집’을 발간한다는 한길사에 부탁했다. 강옥순 편집주간은 고맙게도 ‘쥘부채’를 e메일로 보내줬다.

‘쥘부채’는 1969년 월간지 ‘세대’에 발표된 중편소설. 소설은 ‘하아얀 눈 위에 검은 나비가 앉아 있었다’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은 나비가 아니었다. 길이 7cm, 두께 2cm 남짓의 자그만 부채였다. 너무나 정교하고 섬세해 음습한 요기(妖氣)마저 감도는 쥘부채. 서대문형무소와 가까운 독립문 근처 길가에서 우연히 그것을 주운 대학생 동식은 어떤 운명처럼 쥘부채의 주인을 찾아 나서게 된다.

청실과 홍실, 검은 실 대신 머리칼로 꼰 검은색 술이 달린 부채를 펴면 나리꽃에 머리를 반쯤 묻고 있는 나비가 그려져 있고, 꽃에는 ㅅ,ㅁ,ㅅ이, 나비 날개에는 ㄱ,ㄷ,ㄱ이 깨알만 하게 새겨져 있다.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스물두 살의 처녀 신명숙은 비상조치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1960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고 20년으로 감형됐으나 출감 3년을 앞둔 서른아홉에 병사(病死)해 시신이 되어 나오고, 그 어름에 유류품인 쥘부채는 길가에 떨어진다.

꽃에 새겨진 ㅅ,ㅁ,ㅅ은 신명숙의 이니셜이었다. ㄱ,ㄷ,ㄱ은 신명숙의 애인 강덕기다. 그는 ‘신명숙을 꾀어서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다가 붙들려서 저는 죽고 신명숙은 무기징역을 받게 한’ 사내다. 그러니 신명숙의 가족이 강덕기 가족이 바라는 영혼결혼을 승낙할 리 없다. 쥘부채의 주인인 신명숙의 주소지를 수소문해 찾아간 동식은 부채를 펴 보이고 거기에 새겨진 부호의 비밀을 푼다. ‘나는 죽어 꽃이 될 테니 당신은 죽어 나비가 되어 오라’는 신명숙의 간절한 염원(念願)을.

그 자신 지리산 빨치산이었던 작가가 ‘쥘부채’의 아픈 사연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데올로기의 허망함과 비극적 사랑의 힘이 아니었을까.

분단과 전쟁으로 얼룩졌던 이 땅에는 아직도 그 아픔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쥘부채’의 비극은 이제 과거가 되었고, 과거는 역사의 교훈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이 과거사 청산이란 명분 아래 역사를 정치의 마당으로 끌어낸 것은 그 점에서 매우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사는 청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했던 모든 과거사를 가해(加害)와 피해(被害)의 이분법으로 청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인간 삶의 불가해(不可解)한 다면성(多面性)을 보지 못하는 치기(稚氣)에 지나지 않는다. 만용(蠻勇)은 자칫 또 다른 화(禍)를 부르기 마련이다.

고 김춘수 시인은 2년 전 “지금 한국의 진보주의는 어린아이들 같은 소리”라고 했다. 근본적인 인간성이 바뀌지 않는 한 그렇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시인이 갈파했던 ‘어린아이 같은 진보’야말로 권력에 우쭐해져 사리분별을 잃은 ‘이해찬 골프 파동’의 진면목이 아닐까. 자신들도 버젓이 20의 사회 속에 안주(安住)하면서도 입으로는 계속해 80의 분노를 획책하는 ‘강남 좌파’ 또한 ‘어린아이 같은 진보’의 이중성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부패한 수구보수나 사회공동체에 대한 자기희생은커녕 약자에 대한 연민(憐愍)조차 없이 거들먹거리는 ‘웰빙 보수’가 ‘어린아이 같은 진보’보다 나을 건 눈곱만치도 없다.

‘이병주 기념사업회’가 굴곡 많은 생(生)을 살다간 작가의 재평가 과정에서 한국사회 보혁(保革) 담론의 격(格)이나마 높여 줄 수 있기 바란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