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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기자의 무비 다이어리]방심은 파멸 ‘정글의 법칙’

입력 | 2006-03-23 03:04:00

경기마다 상대를 KO시키며 승승장구하던 매기는 마침내 챔피언십 타이틀 매치에서 사투 끝에 승리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 뒷모습을 보여 무장을 풀어 버림으로써 그녀는 생의 나락으로 빠진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로 표정을 짓고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모든 것이 다 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그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미셸 투르니에 ‘뒷모습’ 중)》

화가 박순철 씨 그림 중에 ‘비는 내리고…’라는 수묵담채화가 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비닐우산을 쓰고 가는 중년 남자의 뒷모습을 그린 것이다. 바지 한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걸어가는 남자의 어깨는 구부정하고 다리는 비틀대듯 한다.

그림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잘생긴 사람인지, 못생긴 사람인지, 부자인 지, 가난한지, 기분이 좋은 상태인지, 나쁜 상태인지, 무슨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뒷모습은 그의 모든 것을 말해 주는 듯하다. 축 처진 어깨에서는 무겁다 못해 처연한 가장(家長)의 책임감이 묻어나오고 구부정한 등에서는 인간이라면 저마다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아무리 꼭꼭 숨기고 덮으려 해도 결코 감춰지지 않는 뒷모습은 정직하다. 얼굴에 화장을 하고 위악과 위선을 넘나드는 훌륭한 표정 연기를 하고, 화려한 치장을 했다 해도 일단 돌아서면, 모두가 평등해진다. ‘나’의 모습이지만, 결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유일한 무방비의 영역, 감추지 못하기에 진짜인 얼굴, 그것이 바로 뒷모습이다.

여기까지는 문학이나 예술의 영역이다. 그러나 복잡다단한 삶의 영역에서는 ‘뒷모습’을 보이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다. 현대인들은 함부로 ‘뒷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더구나 정상에 있거나 정상에 가까이 간 사람들일수록, 부러움과 함께 질투도 배가된다. 이런 사람들이 타인에게 뒷모습을 보이는 일은 곧 치명적인 추락을 예고하는 일이기도 하다.

지난해 아카데미를 휩쓴 화제작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뒷모습’의 의미를 성찰하게 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나이 어린 여성 복서 매기(힐러리 스왱크)와 그를 키우는 초로의 트레이너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 간의 혈육을 뛰어넘는 사랑이야기가 줄거리다. ‘피’를 나눴다는 이유만으로 책임과 사랑을 강요하는 가족 대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과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통해 인간관계의 본질을 생각하게 하지만, 사실은 사각의 링으로 상징되는 고단한 전쟁터인 현대 사회에서 외로운 복서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을 은유한 것이다.

프랭키는 항상 매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자신부터 보호하라.”

노련한 프랭키의 지도로 경기마다 상대를 KO시켜 왔던 매기는 그러나, 챔피언십을 따낼 수 있는 마지막 찬스에서 프랭키의 이 말을 지키지 못했다. 다 이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만 ‘뒷모습’을 보이고 만 것이다.

상대 선수는 돌아서는 매기의 뒷머리를 가격했고 매기는 그대로 쓰러져 버린다.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며 온몸이 마비되고 욕창으로 다리마저 절단되는 상황에 이른 그녀는 프랭키에게 ‘자신을 보호하라’는 말을 지키지 못했다고 말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뒷모습을 보임으로써 정상의 순간에서 추락하게 된 매기의 모습은, 다 이뤘다고 생각하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 온 긴장의 끈을 놓아 버린 또 다른 현대인의 모습이다.

떠나는 자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은 때로 패자나 약자에게 보내는 연민일 뿐이다. 약자의 뒷모습은 동정을 사는 무기일 수 있지만, 강자의 뒷모습은 빈틈이자 약점이며 보여 주어서는 안 될 허점이다. 더구나 지금 우리는 뒷모습조차 연기해야 하는 거친 시절을 살고 있지 않은가.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