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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여인의 희망과 절망…재중동포 장률 감독 ‘망종’

입력 | 2006-03-23 03:04:00

‘망종’은 조선족 여인 최순희의 기구한 삶을 통해 개발과 성장의 뒤안길에 묻히고 있는 중국 밑바닥 인생의 오늘을 담았다. 사진 제공 동숭아트센터


재중동포 장률 감독의 영화 ‘망종’(芒種·두 필름·슈 필름 워크숍 공동제작)이 서울 종로구 동숭동 하이퍼텍 나다에서 23일 개봉된다. 지난해 부산영화제 뉴커런츠 상에 이어 프랑스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 ACID상, 이탈리아 페사로 영화제 대상, 프랑스 브줄 아시아영화제 대상 등 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받은 작품이다.

‘망종’은 보리를 베어내고 볍씨를 뿌리는 시기를 뜻하는 절기. 더 추락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이 움트는 순간을 포착했다는 은유적 표현이다. 주인공은 삼륜 자전거를 끌고 다니며 조선김치를 파는 조선족 여인 최순희. 유일한 가족은 아들 창호. 영화는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녀에게 닥친 불운에 관한 것이다.

불운의 씨앗은 유부남 김 씨. “조선족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며 살갑게 대해 준 김 씨와 사랑에 빠진 주인공은 김 씨의 부인에게 들키고 만다. 그리고 매춘부로 몰려 경찰에 연행된다. 저항 한번 못하고 순순히 경찰서로 끌려간 최순희는 평소 자신의 단골손님인 왕 경찰에게 몸을 주고 풀려나온다.

소수 민족 차별과 여성 차별이 영화의 주조를 이루긴 하지만, 넓게 보면 개발과 성장의 뒤안길에 묻히고 있는 밑바닥 인생들의 이야기다. 망종 때만큼 힘겹고 고단한 삶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살았던 주인공의 심리 상태는 차별과 폭력 때문에 점차 절망으로 변해 간다. 고향 갈 날을 꼽으며 아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치던 그녀가 뒷부분에서 “더 이상 조선말을 배울 필요가 없다”면서 노트를 찢는 장면은 이제 그가 모든 희망을 버렸음을 암시한다.

스토리는 다소 우울하지만, 절제된 대사와 여백의 화면, 군더더기 없는 전개 방식으로 영화적 미학이 돋보인다. 18세 이상.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