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해외에서… “세상은 넓고 시민단체 할 일은 많다”시민단체들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파워그룹으로 부상했다. 이들의 활동은 우리 사회의 질을 높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 세계로 확대되고 있다. 예산 낭비를 감시하는 ‘밑 빠진 독상’(위), 여성의 권리 확보를 위한 출산 휴가 90일 확보 캠페인(가운데), 르완다 난민을 구호하는 활동(아래) 등은 시민운동의 영역이 갈수록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정치운동을 넘어 시민 속으로
1999년 9월 창립된 ‘함께하는 시민행동’은 ‘시민생활 밀착운동’을 벌이는 단체다.
활동의 주안점은 ‘시민들의 혈세가 새고 있지 않은지’를 감시하는 데 있다. 현재 시민행동을 중심으로 전국 40여 개 단체가 예산감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으며 시민행동은 이들 단체를 대상으로 ‘예산학교’를 연다.
시민행동이 2000년부터 예산낭비가 가장 심한 행정기관에 수여(?)하는 ‘밑 빠진 독상’은 시민감시의 상징으로 자리 매김했다.
이 단체 하승창(45) 사무처장은 “예산감시는 가장 시민 중심적인 운동”이라며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예산감시에 나섬으로써 주민자치 실현이란 지방자치제도의 목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여권 신장’을 생활 속에서 실현한다는 점에서 주부들에게 호응을 받고 있다.
이 단체는 유기농산물이나 첨가물을 넣지 않은 가공식품을 주부들이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생산 단체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해 주는 사업을 한다. 여성 교육 환경 지역문제 등 주부의 다양한 관심사를 반영한 강좌를 개설하고 소모임 활동도 열심히 한다.
이 단체 생활협동조합 김연순(43) 부이사장은 “법과 제도는 변했지만 실제 여성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며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이 우리 단체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현재 회원이 1만5000여 명에 이른다.
○ 세계를 누비는 구호단체
구호단체에는 그야말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이들은 가난과 내전, 자연재해 등으로 삶이 어려운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지역에 한국의 따스한 체온을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2000년 이후 구호단체들에 대한 주목도는 훨씬 높아졌다. 이념과 정치에 몰두해 온 시민단체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에게 ‘인류애’란 새로운 화두를 던졌기 때문이다.
굿네이버스는 2002년 르완다에 공립병원을 세웠다. 이후 3년간 10억 원의 병원 운영비를 지원했고 의료기술을 전수했다.
이 단체는 2004년 말 동남아시아에 지진해일(쓰나미)가 강타하자 곧바로 인도네시아 피해지역으로 향했다. 진료와 방역사업은 기본이고 폐허에서 아이들을 모아 동네 운동회를 열었다. 모처럼 마음껏 웃고 목청 높여 소리친 동네 주민들은 ‘원더풀 코리아’를 연호했다.
이 단체 안승진(36) 국제협력부장은 “한국에서는 100원으로 남을 도울 수 없지만 르완다에서는 100원이면 바나나 세 개를 살 수 있다”며 “생명을 살리는 일에 국경과 인종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밖에 ‘월드비전’과 ‘기아대책’ 등의 단체도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다.
조인원(趙仁源·52) 경희대 네오르네상스 문명원 원장은 “시민사회는 보편성과 연계성이라는 가치 위에 새로운 지형을 만들어 가고 있다”며 “이념과 국경을 초월한 시민·구호단체의 활동이 21세기 한국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 시민단체엔 고민도 있다
엄청나게 증가한 시민단체의 양적 성장이 질적 깊이로 이어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지난해 한양대 ‘제3섹터 연구소’가 2년간 국내 100여 개 시민단체의 활동을 분석한 결과 한국의 시민단체는 정부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일반 시민과 소외계층을 위한 활동에는 소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 시민의 시민단체 참여율도 매우 낮아 ‘풀뿌리 운동’이라기보다는 명망가 중심으로 ‘그들만의 활동’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제3섹터 연구소장인 주성수(朱聖秀·행정학) 교수는 “한국 시민단체는 인권증진, 정치개혁 등의 성과를 얻어 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 내진 못했다”며 “시민의 실생활과 관련된 사안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단체들도 이런 지적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서울 YMCA의 한 관계자는 “많은 단체들이 언론에 관심을 끌 수 있는 정치 이벤트에만 관심을 쏟다 보니 시민 없는 시민단체로 전락했다”며 “요즘은 이에 대한 반성 속에서 실질적인 지역운동을 펴는 단체들이 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경실련 vs 참여연대
시민사회단체가 한국사회의 새로운 파워그룹으로 부상하는 데는 참여연대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의 활약이 컸다.
두 단체는 ‘종합시민단체’로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시민운동을 주도했다.
1989년 발족한 경실련은 한국 시민운동의 근간으로 평가된다. 합법적인 틀에서 비판에만 머물지 않고 정책 대안을 제시해 주목받았다. 토지공개념, 한국은행 독립, 금융실명제, 세제개혁 등 중요한 정책 개념을 도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94년 등장한 참여연대는 ‘진보적 시민운동’이란 기치를 내걸었다.
이 때문에 창립 당시 ‘좌(左)실련’으로 불리기도 했다. 참여연대는 사법개혁운동, 작은권리찾기운동, 소액주주운동 등을 주도하며 대표적 시민단체로 발돋움했다.
참여연대의 박원순(朴元淳) 변호사, 경실련의 서경석(徐京錫) 목사 등은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스타 활동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두 단체는 2000년대 들어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고민에 빠져 있다.
참여연대의 회원수는 2001년 말 1만4000여 명에서 지난해 말 9450명으로 줄었다. 경실련 본부에 가입한 회원도 2002년 540명에서 지난해에는 280명으로 감소했다. 1990년대 이후 학생운동이 약화되면서 활동가 충원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김기식(金起式)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민주화와 개혁의 시대를 지나면서 국민들은 개혁이 삶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며 “시민운동 진영이 이에 적극 대처하지 못했다”고 반성했다.
그는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시민운동이 제시해야 한다는 고민을 안고 있다”며 “내부적으로 사회경제개혁 운동을 강화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박병옥(朴炳玉) 경실련 사무총장은 “경제 분과는 보수성이 강하고 사회 분과는 진보성이 강하다”면서 “경실련은 특정 이념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시민의 요구가 다양해지고 시민운동이 분화하는 상황에서 시민단체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경실련은 실사구시적 대안을 내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