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베른 연방사회보험청 입구에 걸린 포스터. 거미(연금)가 노인들을 잡아먹는 그림 위에 ‘우리는 기초연금을 원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1947년 기초연금 도입 반대론자들이 제작한 포스터로 ‘국민의 100% 지지를 받는 연금제도는 없다’는 사실을 잘 일깨워 주고 있다. 베른=정원수 기자
《스위스 베른의 연방사회보험청 현관에 들어서면 섬뜩한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거미가 노인을 잡아먹고 있는 그림이다. 위에는 ‘우리는 기초연금을 원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있다. 거미는 기초연금이고 노인은 연금생활자다. 1947년 기초연금 도입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때 반대파가 작성한 것이다. 스위스는 당시 기초연금을 도입해 지금까지 모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연방사회보험청의 연금담당자인 프랑수아 위베르 씨는 “반대 여론을 항상 염두에 두고 갈등을 조정하자는 뜻에서 60년째 이 포스터를 걸어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
연금 문제는 국민 대부분의 이해가 얽혀 있기 때문에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정치의 좋은 먹잇감이다. 연금의 속성상 가입자나 수급자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는 개혁 시도는 자연히 극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국민에게 솔직하게 문제를 꺼내 놓고 대화를 시도한 나라는 갈등 조정에 성공했고 개혁을 이뤄 냈다. 그렇지 않은 국가는 갈등과 혼란 속에 제도의 허점만 확대하고 있다. 한국도 이제 그 기로에 섰다.
○ 대화와 협상으로 돌파구 찾아
프랑스 사람들은 1995년 4월 3일을 ‘검은 화요일’로 기억한다. 당시 연금 개혁에 반대한 철도노조 등이 대규모 파업을 벌여 프랑스 전역의 교통이 마비됐다.
격렬한 저항 탓에 개혁은 좌초됐다. 그러나 2003년 프랑스 의회는 새로운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1995년 개혁과 2003년 개혁의 차이는 대화와 협상.
프랑스민주노동동맹(CFDT)의 연금담당자인 알랭 프티장 씨는 “1995년 개혁안은 여론을 듣지 않고 정부 독주로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실패를 경험한 프랑스 정부는 2000년 연금조정위원회(COR)를 출범시켜 사회 각층의 여론을 절충한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개혁안은 1995년에 비해 다소 후퇴했다. 철도노조 등의 특별 연금은 개혁 대상에서 빠졌고, 연금 수령 대상을 60세에서 65세로 연장하는 계획도 철회됐다.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노조 지도부는 노조원 설득에 나섰다. CFDT 지도부는 1997년부터 6년간 노조원들과 무려 1000여 차례나 회의를 하기도 했다.
프랑스 노후연금관리공단의 국제관계담당관 폴 올리브 씨는 “누구나 만족하는 개혁은 없기 때문에 연금 문제는 차선책이 최선책”이라며 “갈등 조정의 틀을 만들어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이탈리아는 최근 개혁을 놓고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2004년 2월 로베르토 마로니 노동사회정책 장관이 “6월까지 연금 개혁을 완성하겠다”고 밝히자 바로 다음 달 주요 노조는 총파업을 했다. 협상할 자세보다 각자의 입장이 앞선 탓에 파업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 집단 이기주의 벗어나야
1991년 스웨덴의 주요 5개 정당 대표는 연금개혁위원회를 출범시켜 3년 만에 합의된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합의안을 정치에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 이에 따라 스웨덴의 정당 대표들은 1994년 9월 총선에서 연금 개혁을 선거의 쟁점으로 삼지 않았다.
스웨덴 연금청 연금국장인 울레 세테그린 씨는 “당시 정당들은 연금 문제가 선거에 이용되면 어렵게 만든 개혁안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집단 이기주의에서 자유로운 전문가들이 연금 개혁을 주도해 얽힌 매듭을 푼 사례도 많다.
독일이 대표적이다. 독일은 2001년과 2004년 두 차례 연금 개혁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사용자와 노조 측에서도 참여했지만 실제 대안 마련은 전문가인 학자들이 주도했다. 정치권의 입김은 거의 없었다.
한국의 국민연금관리공단 관계자는 “한국도 연금개혁추진위원회를 만드는 등 독일 방식을 도입했지만 결과는 많이 달랐다”며 “전문가 개혁안이 보건복지부에 가서 크게 수정되고 이것이 국회에 가서 다시 한번 뜯어고쳐졌다”고 털어놨다.
○ 정직하게 설득해야
스웨덴 초과연금청(PPM·개인연금 성격으로 신설된 ‘초과연금’ 관리기구)의 재정담당자인 울레 실빈 씨는 “정부의 연금 지침은 한마디로 ‘가입자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라’로 요약된다”고 말했다.
스웨덴은 1998년 개혁 이후 가입자에 대한 연금 자료 배송을 법으로 명시했다. 개혁 이전에는 자료 요청자에 한해 정보가 제공됐다.
그러나 일본은 ‘꼼수’를 썼다.
일본 정부는 2004년 13.58%의 보험료율(상여금 등을 포함한 총소득 기준)을 2017년까지 18.3%로 대폭 높이는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해 니시자와 가즈히코(西澤和彦) 일본종합연구소 주임연구원은 “후생노동성 관료들이 정치권과 국민을 속여서 개혁안을 밀어붙였다”고 평가했다. 가입자에게 불리한 내용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그 결과 개혁안은 통과됐지만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최근 아사히신문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연금을 내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 전체의 30%였다. 20대와 30대는 각각 42%와 46%로 젊은 층의 불만과 불신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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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판 교수“獨 정치권 입김 배제 전문가에 맡겨 성공”▼
“2004년 연금 개혁 때 정부는 위원회 구성에만 관여했습니다. 연금 전공 교수 등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약 1년간 논의를 거듭했고, 그 결과를 정부는 그대로 수용했을 뿐입니다.”
만하임대 악셀 뵈르슈 슈판(사진) 교수가 밝힌 독일 연금개혁의 성공 요인은 무엇보다 정치색의 배제였다.
슈판 교수는 2004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가 연금개혁 등을 위해 발족시킨 뤼루프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연금에 관한 한 독일 내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뤼루프위원회에는 사용자와 노조, 학계 전문가 등 각 4명씩 모두 12명이 참여했다. 다만 실제 대안 마련은 전문가인 학자들이 주도했다.
위원회는 연금의 객관적인 현실과 미래를 따져 연금 수급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2년 더 늦추고 연금 지급액을 근로세대와 고령인구의 비율에 따라 조정하는 방안을 만들었다.
슈판 교수는 “정치권과 정부가 전문가 안을 그대로 받아들인 게 개혁의 성공 요인”이라고 말했다.
이 덕분에 좌파인 ‘사회민주당-녹색당 연정’이 채택한 이 개정안을 지난해 말 집권한 우파 성향의 기독교민주당도 전격 수용할 수 있었다.
슈판 교수는 “지난 20년 동안 인구통계의 변화와 저출산 문제에 대한 꾸준한 토론이 독일 국민이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독일에서도 연금을 지금보다 적게, 더 늦게 지급하는 개혁안에 대해 국민의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슈판 교수는 “연금개혁을 더 늦췄다가는 연금 보험료와 세금이 현재보다 2배 가까이 높아져 결국은 경제성장률 저조와 실업률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 개혁안이 마련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특별취재팀▽
▽팀장 반병희 차장 bbhe424@donga.com
▽일본 칠레 김광현 기자 kkh@donga.com
▽프랑스 스웨덴 이은우 기자 libra@donga.com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