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공고 식품화공과를 졸업한 이창엽(19) 군은 사장이 되는 것이 꿈이다. 올해 영남대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면서 꿈을 잠시 미뤄 놓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기업체를 갖고 싶어 한다.
그는 고교 2학년 때 제1회 실업계 고교생 사장 되기 창업대회에서 특상인 산업자원부장관상을 받았다. 출품한 창업 아이디어는 ‘엄마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요람’ 개발. 엄마가 안아 주면 쉽게 잠이 드는 아기도 요람에만 내려놓으면 칭얼댄다. 그렇다고 마냥 안고 있을 수도 없다. 아기는 엄마의 심장 소리가 들릴 때 가장 평온하게 잔다는데, 그 소리를 들려주는 요람을 만들면 어떨까. 음성 칩을 이용하면 아주 싼값으로 녹음과 재생이 가능한 장치를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그의 아이디어가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실업계 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사장 되기(Be the CEOs)’ 운동 덕분이다. 민간 봉사단체인 한국시민자원봉사회와 교육인적자원부 산업자원부 등이 공동 주최하는 이 운동은 3년째를 맞고 있다. 학생들에게 성취동기와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을 심어 주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사장 되기’ 운동 관계자들은 ‘공부 잘하는 학생은 인문고로 가고, 못하는 학생은 실업고로 가며, 이런 차이가 인생의 질(質)의 차이로 귀결된다’는 사회적 통념을 깨 보자고 했다. 그래야만 실업고 문제도 해결된다고 믿었으나 초기 반응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2004년 가을, ‘사장 되기’ 운동 본부의 관계자와 한 엘리트 법조인이 벌였던 논쟁을 지금도 기억한다. 이 법조인은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준다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모두 CEO가 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허황된 꿈을 좇다 낙오자가 되는 아이가 더 많을 테니 오히려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자세를 가르쳐 주는 게 나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자영업자 비율이 29.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13.8%보다 두 배 이상 높은데 이들까지 또 영세 자영업 대열로 내몰 것이냐는 지적도 나왔다.
반론에 반론이 이어지면서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우리 아이들은 평생 공장에서 기름칠이나 하라는 거지요?” “그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거지요. 모든 고교생이 사장이 되면 궂은일은 누가 합니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격론 속에 교육과 인간의 평등에 관한 원론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사장 되기’ 운동 본부는 지난해 10월 제2회 창업대회를 열었다. 전국 88개 실업계 고교에서 1000여 명의 학생이 저마다 반짝이는 창업계획서를 제출했고 그중 16개교가 단체상을, 210명이 개인상을 받았다. 참가 학교와 학생도 1회 대회 때보다 크게 늘었다.
이번에도 수작(秀作)이 많았다. 선린인터넷고교 김은채 양은 미아 방지와 치매노인 실종 예방을 위해 보호자와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경고음을 내는 ‘사랑의 팔찌’ 개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경주공고 허총명 군은 ‘살균효과를 첨가한 공기 청정 집진기’를, 부산디지털고 조현욱 군은 다섯 손가락을 모두 사용하는 마우스 개발을 창업 아이템으로 제출했다.
심사위원들은 이들의 창업계획서를 보면서 콧등이 찡해지기도 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기특한 생각을 했을까…. 기성세대의 메마른 마음에서 ‘사랑의 팔찌’ 같은 아이템이 도대체 떠오르기나 하겠는가. 창업계획서의 글자 한자 한자에 담겨진 강렬한 성취 욕구에 놀라고, 이를 제대로 채워주지도 못하는 어른으로서의 자책감에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이들이 모두 훌륭한 CEO가 됐으면 한다. 고령화 시대의 활력은 청소년들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하지 않는가. 정부도 도와야 한다. 여당 실력자들이 실업고를 찾아다니며 아이들 가슴에 적의(敵意)의 불씨나 지핀다고 될 일이 아니다. 확정도 안 된 실업고 대입 특례 확대안을 선심 쓰듯 들먹이는 것도 아이들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다. 정말로 도와주려면 졸업 후 10년을 한 단위로 잡아 이들 삶의 패턴부터 입체적으로 조사하기 바란다. 그 결과를 기초로 취업, 병역, 진학의 3대 변수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지원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선거를 의식한 ‘양극화 장사’에 실업고를 끌어들이려 한다는 비난밖에 더 듣겠는가. 아기에게 엄마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려는 아이들의 마음을 왜 닮지 못하는가.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