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반에 걸쳐 대중의 큰 사랑을 받은 대량 생산 제품을 하나 꼽는다면, 단연 자동차가 첫 손가락에 들 것이다.
자동차는 본래 마차를 대체하는 운송 수단에서 출발했으나, 순식간에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모양새를 바꿔 놓았다. 그래서 20세기 초에 모더니스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자동차가 안겨 주는 새로운 시공간의 체험에 매혹돼 현대의 도시가 거리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속도로 평가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가 프랑스 자동차 기업 ‘부아쟁’의 지원으로 설계한 도시 기획안은 곧게 솟은 스카이라인과 함께 격자 형태로 뻗어가는 도로망을 담고 있었다. 이는 “자동차를 위한 도시”라는 전망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었다.
자동차 디자인 역시 20세기 디자인의 ‘슈퍼스타’라고 할 만큼 대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화려한 꽃은 일찍 지는 법. 스타일의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쟁쟁한 이름의 자동차들을 수없이 언급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아스팔트 위에 머물렀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자동차 산업이 경제 성장의 엔진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매해 디자인을 바꾸는 모델 체인지가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빼어난 자동차라도 해가 바뀔 때마다 ‘페이스 리프트’라고 불리는 성형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대 위에 오르는 것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오랜 세월 큰 변덕을 부리지 않고 대중과 교호하던 자동차들도 있었다. 반세기를 넘겨 가며 2000만 대 넘게 생산된 폴크스바겐의 ‘비틀’, 일명 딱정벌레차가 대표적인 예이다.
○히틀러의 국민차 프로젝트로 탄생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생산되기 시작한 이 자동차의 운명은 꽤 불행했다. 페르디난트 포르셰 박사가 주도한 비틀의 개발은 ‘모터화(motorization)된 제국’을 꿈꾸던 히틀러의 야심찬 기획의 일부였다. 독일의 모든 가족이 주말이면 이 국민차를 몰고 시속 100km로 아우토반를 질주하는 것. 그것은 헨리 포드를 가장 존경하는 미국인이라고 선언했던 히틀러다운 발상이었다.
하지만 1939년에 개발이 완료된 이 자동차의 생산은 전쟁의 총동원 체제 때문에 무기한 연기되었고, 몸체 프레임이 독일군의 소형 군용 차량용으로 징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소박한 외관 뒤에 파시스트의 제복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비틀의 운명을 바꾸지는 못했다. 전후 미국의 원조로 연명해야 했던 유럽의 궁핍한 경제 상황은 비틀을 역사의 무대 위로 불러냈다. 폐허가 되어 버린 유럽 도시의 거주민들에게 값싸고 잔고장이 거의 없는 이 자동차는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던 폴크스바겐의 철저한 사후 관리도 비틀의 인기에 일조했다. 단점이라면 1930년대 풍의 유선형 스타일로 디자인된 탓에 당대의 유행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큰 흠결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단아하면서도 간결한 차체 라인은 이 자동차의 경제성을 보증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소비 문화에 대한 저항의 상징
여기까지가 비틀이 전후 유럽에서 각광을 받게 된 이야기라면 그 이후에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흥미롭게도 1950년대 후반 이후 비틀의 디자인을 주목한 이들은 전후에 성장한 베이비붐 세대의 미국 젊은이들이었다. 당시 미국의 자동차 시장은 ‘디트로이트의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원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디자인의 미학은 빠르게 증가하는 판매 신장 곡선으로 집약된다는 상업주의의 원칙에 따라, 자동차의 덩치는 계속 커졌고 얼굴의 화장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두꺼워졌으며 연료소비효율은 떨어져 가기만 했다.
당시 제너럴 모터스의 디자인 담당 부사장 할리 얼은 자신의 임무가 “값비싼 자동차의 구입으로 시각적 특권을 획득하게 된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여분의 영수증을 발급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크라이슬러의 한 간부는 “메릴린 먼로의 이미지가 자동차 프런트에 투영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세대의 눈에 비친 비틀은 골리앗의 마키아벨리즘에 도전장을 내미는 다윗과도 같은 존재였다. 특히 비틀의 명쾌한 기능주의 미학은 기성세대의 보수적인 권위에 대한 불신과 미국적인 소비문화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시대의 분위기를 담은 영화에서 머리에 꽃을 꽂은 채 비틀을 몰고 우드스톡이나 반전 시위장으로 향하는 젊은이들을 목격하기 그리 어렵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뉴 비틀로 화려하게 부활
독일에서 비틀은 1978년까지 생산되었고, 이후에는 남미로 건너가 개발도상국의 국민차 모델로 생을 마감할 처지였다.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려는 찰나, 비틀은 1997년에 파스텔 색상의 ‘뉴 비틀’로 거듭났다.
뉴 비틀의 디자인을 맡은 제이 메이스와 프리먼 토머스는 비틀의 재해석에 최적의 라인업이었다. 이들은 1995년에 아우디 TT의 콘셉트카를 선보이면서, 비틀에서 유래한 스타일 접근을 실험한 바 있었다. 그것은 간결한 곡선으로 갑충(甲蟲)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단단한 유기적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뉴 비틀은 디자인계에 레트로 스타일(retro style)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젊은 시절에 비틀을 몰았던 중년 이상의 세대엔 추억의 대상으로, 팬시 제품을 수집하면서 유년기를 보낸 젊은 세대엔 귀여운 장난감 미니카의 환생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반세기 넘게 시대의 공기를 호흡했던 비틀 디자인의 생명력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이었을까? 마치 격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죽마고우처럼 세파에 찌들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비틀의 ‘동안(童顔)’이 그 생명력의 근원 중 하나였다.
기능과 성격에 딱 어울리는 그 표정 덕분에 비틀은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인간의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비틀과 더불어 20세기가 그렇게 저물었다.
이건표 교수 카이스트 산업디자인 학과 kplee@ka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