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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금동근]유럽 총리들의 수난을 보며

입력 | 2006-03-30 03:03:00


유럽의 총리들이 수난을 겪고 있다.

도미니크 드빌팽 프랑스 총리는 국민 다수의 호응을 받지 못하는 새 고용법안 때문에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는 최근 불거진 부정부패 스캔들로 윤리적인 면에서 치명타를 입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악재에 시달리면서 정치 생명까지 위협받고 있다.

드빌팽 총리는 내년 대통령 선거에 여당 후보로 나서려던 야심을 접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청년실업 문제를 해소하려고 내놓은 법안이 여론의 거센 반발에 부닥쳐 진퇴양난에 처했기 때문. 여론에 못 이겨 법안을 철회한다면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그렇다고 법안 실시를 강행하면 여당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그를 대선 후보로 내세우긴 어렵다.

그가 추진한 최초고용계약(CPE)법은 청년실업률을 낮추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그는 특히 실업률이 50%를 웃도는 교외 지역 청년을 염두에 두고 법안을 만들었다. 실업률을 낮추자는 법안 때문에 문제가 꼬인 것은 관계자들과 사전에 충분한 협의를 하지 않은 탓이 크다. 그가 법안을 독단으로 추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청년실업률 해소’란 공을 앞세워 대권 경쟁에서 앞서 치고 나가려는 욕심에 눈이 어두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블레어 총리는 지난해 5월 총선에서 부자들에게 거액을 빌리고 그 대가로 종신 명예직인 상원의원 직을 준 의혹을 받고 있다. 대출을 해 준 사람 가운데 100만 파운드 이상을 낸 3명이 총리 추천으로 상원의원에 임명되었다. 취임 때 누구보다도 청렴결백을 강조했던 그로서는 치명적인 일이다.

그 역시 총리 연임이라는 욕심 때문에 대가성 대출이라는 무리수를 둔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주요 언론매체는 물론 여권 내에서도 총리 직을 넘기고 물러날 것을 권하고 있다.

이달 중순 이탈리아 검찰은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위증 교사’ 혐의로 기소했다. 1997, 98년 탈세와 돈세탁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 법률고문에게 위증 대가로 60만 달러를 준 혐의가 포착됐기 때문이다. 다음 달 9일 총선을 앞두고 있는 베를루스코니 총리로선 커다란 악재다. 그의 부정부패에 이미 염증을 느끼고 있는 지식인들은 “그가 재집권하면 이탈리아를 떠나겠다”고 할 정도로 크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주 로마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서임 후 기자회견을 지켜보며 이들을 생각했다.

정 추기경은 “지도자는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국민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한다”면서 “국민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지도자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특정한 누구를 향해 던진 메시지는 아니었으며 지도자들이 당연히 갖춰야 할 보편적인 덕목을 아주 단순하고 간결하게 제시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추기경은 “추기경이 또 한 명 탄생하도록 국력을 신장시켜 준 국민께 감사하다”고 수없이 반복했다. “국민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나 고민이다. 부족한 점이 있으면 기탄없이 야단쳐 달라”는 추기경의 말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런 게 아닐까. 지도자들이 국민의 성원으로 자리에 올랐다는, 그 단순한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대의를 그르치는 일은 없지 않을까. 국민의 생각을 무시하고 독단으로 정책을 추진한다거나 지위를 악용해 불법 탈법을 저지르는 일은 모두 국민의 행복이 아닌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한국도 얼마 전 총리가 물러나고 새 총리의 취임을 기다리고 있다. 새 총리 후보자는 정 추기경이 지도자들을 향해 던진 메시지를 누구보다도 곱씹어 보기를 바란다.

금동근 파리 특파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