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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七. 烏江의 슬픈 노래

입력 | 2006-03-31 03:02:00

그림 박순철


패왕은 앞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보검으로 베어 넘기며 점점 한군(漢軍) 깊숙이 헤쳐 들어갔다. 몸 전체가 바로 빠르고 날카로운 칼이 되어 한군의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것 같았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사람처럼 패왕이 지나가는 길 양편으로 한군의 시체가 줄을 이루었다. 사기(史記)의 기록은 그때 패왕 홀로 베어 죽인 한군이 수백 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패왕을 에워싼 한군도 악착스러운 데가 있었다. 패왕의 목에 걸린 상금과 관작이 자극한 물욕 탓이었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았다는 것 때문일까, 패왕인지 아닌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군은 불빛에 날아드는 나방들처럼 패왕 곁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장수들에게는 패왕이 바로 그만 한 크기의 황금 덩어리 또는 제후의 휘황한 인수(印綬) 같았다. 말 위에서 저만치 패왕을 내려보며 사냥개들이 사나운 짐승의 기운을 빼주기를 기다리듯이 병졸들이 패왕의 힘을 모두 짜내 주기를 기다렸다.

그 사이 패왕도 온 몸을 여남은 번이나 찔렸다. 그 상처가 점점 무거워지면서 패왕도 마침내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느꼈다. 한 차례 무섭게 보검을 휘둘러 몰려드는 한군을 쫓아버린 뒤에 정신을 가다듬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초나라 기사마(騎司馬)로 있다가 광무산에서 사라진 여마동(呂馬童)이었다. 짐작대로 한나라에 항복해 그 장수가 된 듯했다.

이전의 패왕 같으면 그런 여마동을 먼저 꾸짖고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드디어 죽을 자리를 찾은 것 같은 느낌에 오히려 여마동이 반가웠다. 짐짓 목소리를 너그럽게 하여 여마동을 불렀다.

“그대는 예전에 나와 알고 지내던 사람[고인]이 아닌가?”

여마동은 자신의 배반을 꾸짖지 않고 그렇게 에둘러 물으며 아는 체하는 패왕을 감히 마주 바라보지 못하였다.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곁에 있던 낭중기(郎中騎) 왕예(王예)에게 패왕을 가리키며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저 사람이 바로 항우요.”

이미 왕예가 짐작하고 있던 일이라 해도, 패왕에게는 그렇게 일러바치는 여마동이 괘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패왕은 모처럼 얻은 죽을 자리를 감정에 치우쳐 잃고 싶지 않았다. 여마동의 말을 듣지 못한 척 호탕하게 말했다.

“내가 들으니 한왕은 내 머리를 천금(千金)의 상과 만호(萬戶)의 읍(邑)으로 사려 한다고 하였다. 이제 지난날 알고 지내던 정으로 그대에게 은덕을 베풀 터이니, 이 머리를 한왕에게 가지고 가서 상과 벼슬을 청하여라.”

그리고는 들고 있던 보검으로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自刎而死]. 그걸 본 왕예가 잽싸게 달려가 패왕의 목을 자르고 먼저 그 머리를 차지하였다. 그러자 뒤이어 몰려든 나머지 낭중들이 남은 패왕의 몸을 차지하려고 서로 짓밟으며 치고받는데, 그때 저희끼리 다투다 죽은 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다. 마지막으로 패왕의 몸은 네 토막이 나서 기사마 여마동과 낭중기 양희(楊喜), 그리고 낭중 여승(呂勝)과 양무(楊武)가 각기 한 토막씩을 차지했다.

실로 비정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인간의 물욕이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패왕 항우가 보여 준 기이한 정신적 고양에 견주면, 그 물욕은 끔찍한 자기 모독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인간성의 추락이었다. 진정 이 세상의 무엇이 고귀하고 무엇이 하천(下賤)한가. 사람의 무엇이 위대하고 무엇이 비소(卑小)한가.

태사공(太史公=사마천)은 항우의 죽음을 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하지만 뉘 알랴. 이 또한 패자(敗者)에게 내려진 역사의 비정한 선고문이 아님을.

왕예를 비롯한 다섯 사람이 패왕 항우의 몸 한 토막씩을 들고 한왕의 진중으로 가서 상을 청했다. 한왕이 그들이 가져 온 것을 맞추어 보게 하니 과연 패왕 항우의 주검임에 틀림없었다. 이에 상으로 내건 금도 땅도 다섯으로 나누어 왕예를 두연후(杜衍侯)로 봉하고, 여마동을 중수후(中水侯), 양희를 적천후(赤泉侯), 여승을 열양후(涅陽侯), 양무를 오방후(吳防侯)에 각기 봉하였다. 한왕다운 포상이었다.

한왕은 패왕이 죽은 걸 확인하고서야 군사를 나누어 초나라 땅을 평정하게 했다. 그러나 그때부터는 맞서다 항복해도 용서하지 않아, 초나라 땅이 모두 평정될 때까지 보름도 안 되는 동안에 한군이 목 벤 사람이 8만 명이나 되었다. 어찌 보면 그 또한 한왕다운 징벌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 한 예외가 노현(魯縣) 사람들이었다.

초나라 모든 성이 한군에게 항복했는데도 오직 노현만이 성문을 닫아 걸고 버틴다는 말을 듣자 한왕은 몹시 성을 냈다.

“노현을 도륙하여 천하에 본보기를 보이리라!”

한왕이 그렇게 말하며 몸소 대군을 이끌고 노현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 성 아래 이르러 들어 보니 적군에게 에워싸인 성 같지 않게 현(絃) 뜯는 소리와 글 외는 소리가 그윽하게 들려왔다. 그제야 한왕은 노현이 옛 노나라 때부터 예의를 숭상했던 땅으로서, 이제 제 주인을 위해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키려 한다는 걸 알았다. 예전에 초 회왕이 항우를 노공(魯公)에 봉한 적이 있어 그때 이후로 노현 사람들은 항우를 주인으로 알아 왔기 때문이다.

이에 한왕은 군사를 몰아 성을 치는 대신 사람을 보내 패왕의 머리를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노현의 부형(父兄)들에게 그 머리를 보이며 달래자 마침내 노현 백성들도 성문을 열고 한왕에게 항복했다. 한왕은 그들을 용서하고 패왕을 노공의 예우로 곡성(穀城)에 장사지내게 하였는데, 노현을 떠날 때는 패왕을 위해 큰 소리로 울며 갔다[哭之而去]고 한다. 한왕 유방에게도 패왕의 죽음을 바라보는 나름의 감회는 있었을 것이다.

그때 제후들은 모두 제 봉지로 돌아간 뒤였다. 경포는 구강으로 돌아가고 팽월은 양(梁)땅으로 돌아갔으며 한신도 제(齊)나라로 돌아갔다. 그런데 거기서 한왕은 천하를 차지하여 새 제국을 열 왕자(王者)다운 비정과 결단을 다시 한번 섬뜩하게 보여 준다. 노현을 떠난 한왕은 한신이 대군을 이끌고 아직 정도(定陶)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자 갑자기 군사를 그리로 돌렸다. 그리고 불시에 한신의 진채를 덮쳐 그의 군사를 모두 뺏은 뒤 제왕(齊王)의 왕위까지 거두어 버렸다.

한왕 유방의 천하통일은 제왕 한신을 다시 한 무력한 신하로 곁에 묶어둠으로써 비로소 그 모양이 갖춰졌다. 그제야 천하에서 한왕에게 맞설 만한 세력이 온전히 없어진 셈이었다. 그 뒤 한 달도 안돼 한왕은 한신을 다시 초왕(楚王)으로 세우지만, 그때 자신은 이미 황제로 즉위할 기반을 튼튼하게 다져 놓은 뒤였다.

한(漢) 5년 2월 갑오(甲午)일 한왕 유방은 범수(氾水) 북쪽에서 단을 쌓아 하늘에 고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이가 곧 한고조(漢高祖)다. 처음에 잠시 도읍을 낙양에 했다가 함양(뒷날의 장안)으로 돌아가는데, 나중에 낙양에 도읍하게 되는 동한(東漢)과 구별해 그때의 한나라를 서한(西漢)이라 부르기도 한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