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창간기획]‘85년 독자’ 92세 김덕형옹

입력 | 2006-03-31 03:02:00

집에서 보관 중인 동아일보를 보여 주는 김덕형 옹. 일곱 살 때 서당에서 동아일보를 처음 접했다. 기사 제목과 기자 이름을 공책에 적어 가며 신문을 정독한다. 김 옹은 “신문이 너무 상업적이어서는 곤란하고 용기를 갖고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남해=강정훈 기자


《“우리 마을의 고암(鼓巖)서당에서 글을 배울 무렵 동아일보를 처음 만났지. 신문에서 봤던 한자(漢字)가 천자문에 나와. 그래서 맞히면 상급생들이 칭찬과 함께 엿이나 곶감을 사 주던 기억이 생생해요.” 경남 남해군 남해읍 남변리 김덕형(金德衡·92) 옹. 동아일보를 일곱 살 때 서당에서 처음 만났다. 창간 이듬해인 1921년. 그렇게 시작한 동아일보와의 인연이 80년을 넘었다. 신문이 귀했던 당시 마을 사람들은 동아일보를 돌려 가며 읽었다. 학동들이 글자 연습을 하고 나면 벽지로 활용하는 집이 많았다.》

1936년 8월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동아일보는 손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 정간되는 등 어려움을 겪다가 1940년 8월 10일 폐간됐다.

그는 “학자였던 선친께서 ‘나의 유일한 친구이자 세상의 등불인 신문이 안 나온다’며 안타까워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김 옹은 30일 기자를 만나 “요즘 재미있는 기사가 많이 나던데…. ○○○ 부국장 그 양반 하고 ○○○ 논설위원이 간 큰 소리를 자주 하고…”라고 말했다.

그는 동아일보를 그냥 읽지 않는다. ‘도장을 파듯’ 꼼꼼히 본다. 배달된 신문은 얇은 노끈으로 중간을 꿰맨다. 그 다음 한 번 쭉 읽고 접어 둔다.

저녁에 다시 신문을 편다. 첫 쪽부터 마지막까지 기사 제목과 기자 이름을 공책에 적어 가며 정독한다. 김 옹의 ‘신문 제목록’ 수십 권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는 “신문을 읽으면 기억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것을 훤히 알 수 있어 좋다”며 웃었다. 국제 정세를 알아야 나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며 국제면도 즐겨 읽는다.

집은 도서관이나 박물관을 떠올리게 한다. 신문철 스크랩북 자료철 메모 명함철 책이 가득하다. 장서는 2만 권에 이른다.

김 옹은 5년제 진주공립농업학교를 다녔다. 재학 시절 달리기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원예시험장에서 1년간 연수를 받고 귀국한 뒤 1938년부터 경남도청과 울산군청, 거창군청, 남해군청에서 과수와 원예 관련 업무를 봤다.

그의 인생에서 ‘일대 사건’인 미군기 추락은 광복을 1주일 앞두고 발생했다. 하동군청으로 전보되기 직전인 1945년 8월 8일이었다.

새벽 남해 망운산 기슭에 미군 폭격기 한 대가 일본군 고사포를 맞고 추락했다. 기장을 포함해 11명이 전사했다.

김 옹은 일본군이 버려 둔 미군 유해를 어렵게 수습하고 임시로 매장했다. 그는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미군 유해는 이듬해 3월 본국으로 송환됐다.

광복 이후에는 ‘남해중등교육설치 기성회’를 만들어 교육시설 개선에 힘썼다. 교직에 나가려다 꿈을 이루지 못하자 부인 이름으로 약방을 차리고 자신은 농약상을 경영했다. 1948년에는 잠시 동아일보 남해지국 기자로 일했다.

1956년 11월 30일 망운산 옥조봉 아래 그가 염원하던 비석 하나가 세워졌다. 3.6m 높이의 ‘미 공군 전공기념비’. 제막식에는 미국 대통령 특사가 참석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보낸 친필 휘호가 비문에 새겨졌다.

김 옹의 이야기는 ‘남해의 전공비’라는 제목으로 1958년 발간된 초등학교 도의(도덕) 교과서에 7쪽에 걸쳐 실렸다.

사단법인 미 공군전공기념사업협회를 조직한 그는 사비를 들여 자기 집 3층에 ‘미 공군 전공 기념회관’을 마련하고 지금도 해마다 8월이면 추모식을 거행한다.

김 옹의 ‘민간 외교’는 국내보다 미국에 더 잘 알려져 있다. 미국 참전용사와 단체로부터 많은 표창과 격려 편지를 받았다.

그는 “우리 세대는 나라 잃은 설움을 알고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지만 요즘 젊은이들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옹의 둘째 아들 종기(鍾起·52·서울 거주) 씨는 “어릴 때는 동아일보를 보고 철하는 것이 큰일이었다. 아버지가 신문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유별나신지 조금이라도 훼손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김 옹은 맨손체조와 산책으로 건강을 관리한다. 버스로 4시간 40분 걸리는 서울 나들이도 자주 한다.

평생 동아일보를 동반자로 삼아 온 그는 “신문은 꾸준해야지 자주 변하면 안 된다. 너무 상업적이어서는 곤란하고 용기를 갖고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남해=강정훈 기자 man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