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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우리글 지킴이 이수열 솔애울 국어순화연구소장

입력 | 2006-04-01 03:00:00

스스로 ‘우리글 지킴이’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국어학자 이수열 씨. 원고지 10장을 쓰면서 그의 지적을 피해 가기는 무척 힘들다. 이 씨가 저서 ‘우리말 바로 쓰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원건 기자


기자가 선생을 만난 것은 이번이 5번째다.

처음엔 그의 저서 ‘우리말 바로 쓰기’를 교재로 본인에게서 직접 강의를 들었다. 기자가 쓴 칼럼을 ‘빨간 사인펜’으로 ‘세게’ 교정을 본 후 우편으로 보내 주었다. 세 번이나 그랬다. 이 기사를 쓰기 위해 만난 것이 선생과의 5번째 만남이다.

이수열(78) 솔애울 국어순화연구소장. 그는 매일 아침 신문 칼럼 10∼20개를 백지에 오려붙여 잘못된 표현을 빨간 사인펜으로 고친 후 필자에게 우편으로 보내 준다. 연간 5000여 건이나 된다. 그래서 칼럼을 자주 쓰는 교수들은 대개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 왜 그런 일을 하는 걸까.

“칼럼은 교수가 많이 쓰잖아. 많은 사람을 가르치는 분들이 우리말을 제대로 쓰면 파급 효과가 클 것으로 생각했지. 그런데 별로 나아지질 않아.”

선생의 불만은 신문 칼럼에 그치지 않는다.

“헌법부터 잘못됐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1조), ‘모든 국민은 ∼할 권리를 가진다’(10조)는 영어 번역 투야. ‘국민에게서 나온다’, ‘∼할 권리가 있다’로 고쳐야 해. ‘국군의 외국에의 파견’이나 ‘외국 군대의 대한민국 영역 안에서의 주류’(60조) 같은 표현은 일본어를 흉내 낸 기형 문장이고.”

그의 불만은 이어졌다.

“헌법은 나라가 국민에게 한 최고의 약속이야. 그런데 일본어 영어 중국어식 표현으로 아주 일그러진 모습이 됐어.”

그는 헌법의 악문(惡文)을 바로잡는 책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대한민국 헌법’을 펴냈다. 국어교과서에 있는 잘못된 표현을 잡은 ‘우리글 갈고 닦기-국어교과서 다시 써야 한다’는 책도 썼다. 헌법은 요지부동이지만 선생 덕분에 교과서는 많이 바뀌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지만 선생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표현을 몇 개 더 예시해 보자.

·의사들이 연극 공연을 갖는다→ ∼연극 공연을 한다

·임명동의안을 가결시켰습니다→ ∼가결했습니다

·전통이 뒤집어졌다→ ∼뒤집혔다

·정답은 3번이 되겠습니다→ ∼3번입니다

·배고팠던 시절이 있었다→배고픈 때가∼

·고성이 오가는 상황이 벌어졌으나→고성이 오갔으나

표현에 대한 그의 문제 제기는 표기법에 그치지 않는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탈당과 이적을 일삼는 철새 정치인들 있지. 이를 언론에서 합종연횡(合從連衡)이라고 부르는데 말도 안 돼. 전국시대에 강국 진(秦)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진의 동쪽에 세로로 늘어선 한(韓) 위(魏) 조(趙) 제(齊) 연(燕) 초(楚) 6국이 동맹한 것을 합종이라 하고, 진이 이들 소국과 개별 연대하면서 합종을 깨뜨린 것을 연횡이라 했어. 고도의 외교전략이지. 철새 정객의 움직임은 ‘오합지졸의 이합집산’이라 하면 딱 맞아.”

경기 파주시에서 나무꾼의 아들로 태어난 이 씨는 최종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다. 하지만 교원자격시험에 합격해 모교인 봉일천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중고교에서도 국어를 가르쳤다. 외솔 최현배의 ‘우리말본’ 등 문법서로 독학을 하던 그는 1993년 정년퇴직하자 곧 ‘우리말 바로 쓰기’를 펴냈다. 이 책은 곧 12쇄가 나온다.

이 책이 눈에 띄어 그는 동아일보에 초청돼 1주일간 기자들에게 ‘바른 글쓰기’ 강의를 했다(기자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이 이때다). 그리고 10년 이상 모 문화센터에서 주3회 ‘한글 바로 쓰기’ 강좌를 담당하고 있다. 한글학회는 그를 ‘2004년 우리글 지킴이’로 선정했다.

선생의 지적에 대개 ‘감사’의 반응이 오지만 불평도 없지 않다. 어법을 지나치게 고집하기 때문. 예를 들어 선생은 ‘그’나 ‘그녀’라는 말에 대해 결연히 반대한다. 영어(he, she)의 일본어 번역을 다시 억지 번역한 거라는 설명이다. 대안은 뭘까.

“그분, 당신, 걔, 소녀 등 많잖아. 사나이, 여인, 부인, 여사, 노파, 나그네 등도 3인칭 대명사로 쓰는 데 손색이 없어.” 이 기사를 쓰면서 기자는 선생의 권고를 따르려 애썼지만 이 대목만큼은 쉽지 않았다.

선생은 심지어 “‘서로가 서로를 위해야 한다’는 말은 틀렸다. ‘서로’는 부사이므로 격조사를 붙일 수 없다”고 일갈했다. ‘서로 위해야 한다’로 고쳐야 한다는 것. 그는 격조사를 붙이지 말아야 할 부사로 서로 외에 ‘그대로’ ‘스스로’ ‘모두’를 더 꼽았다.

도발적으로 물어봤다. “아니, 말이란 언중(言衆)에 의해 변화하는 것이지 고정 불변의 계명이 아니지 않은가?” 어떤 교수도 “‘서로’가 무슨 해병대인가? 그게 한번 부사면 영원히 부사냐”고 항변했다고 한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어법은 함부로 바꾸면 안 돼. 그 교수가 나를 보고 ‘우리말을 지키는 소금’이라고 추어주더군. 근데 이 소금 맛이 너무 짜다는 거야. 아, 소금이야 짜야지. 그걸 많이 쓰거나 적게 쓰는 것은 요리사 맘이지만.”

허승호 기자 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