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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홍권희]제 솥 걷어찬 鄭회장 父子

입력 | 2006-04-06 03:00:00


미국식 경영의 위기를 불렀던 분식(粉飾)회계 사건은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처벌로 마무리돼 간다. 피고들은 “나도 속았다”는 똑같은 핑계를 댔지만 검찰은 자본주의의 자존심을 걸고 ‘썩은 사과’를 찾아냈다.

요즘 ‘미국 역사상 최대의 기업범죄’라는 엔론 사건 재판엔 케네스 레이 창업주와 제프리 스킬링 전 회장이 나온다. 42건의 사기 등 혐의에 유죄판결이 내려지면 수십 년의 징역형이 될 가능성이 있다. 회계부정을 저지른 월드컴의 버나드 에버스 전 회장은 작년 7월 25년형을 선고받았다.

국내에도 썩은 사과가 적지 않다. 분식을 가볍게 여기던 시절에 누적된 회계부정을 계속 끌고 가는 ‘폭탄 돌리기’를 제외하고도 그렇다니 큰 문제다.

현대자동차그룹의 비자금 조성과 경영권 편법 승계 과정에 대한 검찰 수사에 속도가 붙었다. 현대차 계열사 글로비스의 대형 비밀금고에선 현금 50억 원이 발견됐다. 이 금고를 거쳐 간 검은돈은 얼마나 되며 어디로 흘러갔을까.

글로벌 기업이라고 자랑하던 현대차여서 그랬는지, 수법도 글로벌이다. 해외에서 비자금을 세탁하고 계열사를 구조조정 전문회사에 넘겼다가 되사들여 돈과 주식을 정몽구 회장의 장남인 정의선 기아자동차 사장에게 집중시켰다고 한다. 게다가 이런 작업이 수년간 조직적으로 진행돼 온 흔적도 드러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부실회사에 투입됐다가 정 사장 주머니로 옮겨간 공적자금은 국민 세금이다.

검찰은 ‘현대 스캔들’에서 정 회장 부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혀야 한다. 일각에선 음모론 또는 경제충격론을 제기하지만 현대 사건은 변칙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자금 운용에 로비 의혹이 곁들여진 범죄 혐의를 받고 있다.

정 회장 부자는 2001년 50억 원을 투자해 설립한 글로비스를 작년 12월 상장시켜 1조 원의 평가이익을 만들어냈다. 정 사장은 이렇게 번 돈의 일부로 기아차 주식을 사들이기도 했다. 이때 ‘대박’이라는 평가와 함께 ‘너무했다’는 의혹 어린 시선도 많았다. 현대차그룹의 밀어주기 행태에 대한 설왕설래가 시장에 파다했다. 주식재벌 1위 부자가 증시를 끼고, 다소 어설프면서 대담하게 일확천금을 노린 것은 쓴웃음을 자아낼 정도다. 과욕 탓이다.

정부나 여권이 대기업 규제를 쏟아내고 성장을 시샘하는 발언을 할 때 기업 편을 들어주는 국민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기업인의 탈법이나 일탈(逸脫)까지 받아줄 것으로 착각해선 안 된다.

미국은 주주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 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를 가차 없이 다스린다. 우리도 자유시장경제를 지키고 키우려면 반(反)기업정서를 부채질하는 행태는 엄단해야 한다. 속속 드러나는 현대차그룹의 혐의 사실은 반기업정서에 기름을 붓고 있다.

국내에서 슬쩍 봐준다고 해도 세계무대에선 통하지 않는다. 박용성 전 두산 회장 일가의 비자금 사건 때 검찰과 법원은 모두 봐줬다. 검찰은 ‘스포츠 외교’와 ‘국익’을 핑계로 댔다. 그러나 1심판결 직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박 IOC 위원의 자격을 정지시켰다. 썩은 사과를 우리가 골라내지 못하니 외국에서 대신 손을 쓴 셈이다. 두 번 창피당한 꼴이다.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