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신무용 창작에 바친 한국무용가 김백봉 씨. 김 씨는 “고전무용이 먹물과 붓으로 그린 동양화라면, 신무용은 유화물감으로 그린 산수화라고 할 수 있다”며 “창작 춤의 활성화로 한국무용을 풍성하게 만들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경모 기자
화려한 부채들이 뱅글뱅글 돌아가며 때로는 꽃봉오리처럼 피어나고, 때로는 파도처럼 일렁이며 우아한 곡선을 만들어 내는 부채춤. 국제사회에서 한국 춤의 상징처럼 인식되지만 이 춤이 처음 공연된 것은 불과 1954년의 일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2000명의 무용수가 공연해 세계를 놀라게 한 스펙터클한 ‘화관무(花冠舞)’. 전통 궁중무용인 ‘정재(呈才)’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 춤도 역시 1948년 만들어진 ‘신(新)무용’이다.
‘부채춤’과 ‘화관무’를 만든 김백봉(金白峰) 서울시무용단장. 광복 후 한국 무용계에서 서양무용과 한국무용이 결합된 ‘신무용’ 장르를 개척해 온 그가 올해로 팔순을 맞았다. 13, 14일 세종문화회관에서는 ‘한국 신무용 80년사(史)와 김백봉 예(藝)의 삶’이란 제목으로 제자들이 그의 춤 인생을 기리는 공연을 헌정한다. 70여 명의 무용수가 ‘부채춤’, ‘화관무’, ‘섬광’, ‘장구춤’, ‘만다라’ 등 김 씨의 대표작들을 무대에 올린다.
김 단장은 요즘도 손녀뻘의 후배들에게 춤을 가르치는 일로 분주하다. 5월 8, 9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정기공연을 하는 서울시무용단이 자신이 창작한 ‘심청’(1975년 작)을 추기 때문이다.
김 단장이 무대에 직접 오른 것은 지난해 6월 서울시무용단의 정기공연 ‘무애지무’ 때 5, 6분 되는 산조 춤을 춘 것이 마지막. 그러나 연습실에서는 여전히 직접 춤사위를 보여 준다.
“지난해 시립무용단을 맡은 후로는 안무를 하다 보니 오히려 건강이 좋아졌어요. 일주일에 닷새씩 결근 한 번 안 하고 잘 다닌답니다.”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김 단장의 본명은 김충실(金忠實). 무용가로 나서며 발레 ‘백조의 호수’의 ‘백’자와 평양 사람들에게는 서울의 남산 같은 존재인 ‘모란봉’의 ‘봉’자를 따서 예명을 ‘백봉’이라 지었다. 무용가로서 그에게 불멸의 우상은 은사 최승희(崔承喜·1911∼?)지만 무용가의 길로 이끈 것은 아버지다.
“아버지가 어느 날 잠든 저를 깨워 최승희 선생의 사진을 보여 주며 ‘우리나라의 자랑’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때만 해도 춤을 추면 기생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오히려 ‘최 선생은 사람들이 손 뻗어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셨어요.”
김 단장은 열네 살 때인 1941년, 당시 일본 도쿄(東京)에 체류 중이던 최승희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됐다. 이후 스승과 함께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각국 순회공연을 했다.
“최 선생은 다른 한국 무용가들처럼 ‘승무’ 같은 전통 춤사위를 배워서 입문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서구무용으로 몸을 단련한 뒤 한국적 춤을 이용해 발전시킨 ‘신무용’의 개척자였죠.”
1944년 스승 최승희의 시동생인 무용이론가 안제승(전 경희대 교수·1996년 작고) 씨와 결혼해 스승과 동서가 된 김 단장은 1946년 7월 스승 최승희 부부와 함께 월북했다.
“이북에 가서 진남포에 내리니 소련 사람이 우리를 지프에 태워 김일성에게 데려다 줬어요. 김일성의 첫마디가 ‘최승희 동무, 다니러 왔어요? 살러 왔어요?’였죠. 선생님이 ‘살러 왔다’고 했더니 모란봉 밑에 있는 요릿집을 연구소로 쓰라며 내주더군요. 첫날 저녁 김일성이 보내준 선물이 굵은 파 한 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김 단장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남편과 함께 다시 ‘남쪽’을 택했다. 이후 그는 ‘부채춤’ ‘장구춤’ 등 자신이 안무한 대표작을 내놓았다. 김 단장은 스승의 예술세계를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 춤 세계를 펼친 600여 개의 창작무용을 만들어 냈다. 지난해 11월에는 청계천 복원에 맞춰 창작무용 ‘청계(淸溪)’를 발표하기도 했다. 월남 후 서울에서 살아온 자신의 인생과 무용 세계를 담은 작품이었다.
김 단장의 춤은 ‘한(恨)’의 정서에 기반을 둔 전통 무용에 비해 경쾌하고 산뜻하다. 그래서 그의 춤이 진정한 우리 춤의 모습은 아니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김 단장은 “현재 전해지는 승무나 살풀이도 예전의 누군가가 창작한 춤이었다”며 ‘전통의 창조’를 주장한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미 고전이 된 신무용의 창작 춤이 제대로 전수되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창작 춤이 제대로 전수되지 않는다면 현대 한국무용의 미래도 없을 거예요.”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