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서로 다른 형상을 보여주는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꿈틀거리는 조각 같은 이 미술관은 프랭크 게리의 상상력과 컴퓨터의 결합으로 탄생했다. 사진 제공 이건표 교수
‘철근과 모르타르의 유토피아에 최종적으로 파산 선고를 내린 유리와 티타늄의 네오 바로크적 스펙터클’ ‘촉수 같은 곡면이 끝없이 펼쳐지는 유기적인 조각 오브제’ ‘금색 뱀 머리의 메두사를 연상시키는 입체적인 추상 조각’….
1997년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이 스페인 빌바오에 완공되었을 때 쏟아진 찬사다.
투시도의 고정된 시선이 포착해내기 어려운 이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은 중력의 굴레를 벗어던지려고 몸부림치는 듯하다. 곡면들은 사방으로 뻗어나가기도 하고, 제 멋대로 꿈틀거리며 서로 부딪치기도 한다. 그래서 그것을 응시하는 이들은 현기증을 느끼며 휘청거린다. 다만 추상적 형태가 제공하는 연상의 흐름만이 보는 이의 마음에서 가늘게 이어질 뿐이다.
○ 디자이너와 컴퓨터의 파트너십
지표면에 불시착한 미확인 비행물체(UFO)처럼 보이는 이 건축물의 조형 언어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게리의 시각적 상상력?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한다. 192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난 이 건축가는 1990년대 초반까지 구겐하임 빌바오와는 다른 스타일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변신의 비결은 그가 사용한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있었다. 프랑스의 우주항공기업 ‘다소시스템’사가 개발한 3D 모델링 소프트웨어 ‘카티아’가 그것이다.
카티아를 활용한 게리의 디자인 초기 단계는 일반 과정과 다르지 않았다. 게리는 직접 손으로 스케치를 하거나 실물의 모형을 만드는 ‘목업(mock-up)’을 통해 아이디어를 실제 형태로 구현했다.
게리의 상상력이 진가를 발휘한 것은 여기까지. 이후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카티아였다. 이 소프트웨어는 게리의 목업 데이터를 근거로 시공의 적합성을 판단하기 위해 구조 역학적 계산을 하고, 쾌속 조형 공정(rapid prototyping)을 통해 축소 모델을 만들었다. 이는 영화의 포스트프로덕션 단계에서 촬영된 영상에 특수 효과를 입히는 작업과 닮았다.
이런 독특한 과정에서 게리는 조각과 건축은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가 아무리 복잡한 3차원의 조각 오브제를 빚어내더라도, 카티아 프로그램은 그것을 건축적 구조물로 변형시켜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시스템의 지원 덕분이었다. 이 기업의 입장에서 보자면, 빌바오 프로젝트는 윈-윈 게임이었다. 게리는 카티아 프로그램의 우수성을 알리는 홍보 대리인의 역할뿐만 아니라 기능 업그레이드의 테스터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디자인 실무에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반. 당시 제너럴모터스나 보잉사는 자동차나 비행기의 설계를 돕는 CAD(Computer-Aided Design) 프로그램의 개발에 많은 투자를 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종이 위에 디자인된 시각 정보를 도면 데이터로 번역하는 수준에 그쳤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여전히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며 아이디어를 구상했고, CAD 프로그램은 도면을 완성하거나 랜더링을 마무리하는 데 국한되었다. 말 그대로 컴퓨터는 디자인 작업의 보조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화두로 부상하면서 빠르게 진화했다. 이 무렵 그래픽 처리 속도가 놀랍게 빨라지고, 유연한 곡면을 표현할 수 있는 모델링 알고리즘도 개발됐다. 영화 ‘터미네이터 2’의 액화 금속 사이보그 ‘T-1000’이 자유롭게 변신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성과 덕분이었다.
변화의 격랑은 스크린 위에만 머무르지 않고 디자인 실무에도 밀려들었다. 컴퓨터의 보조를 받는 디자인은 점차 컴퓨터를 통한 디자인으로 위상이 높아졌고 이에 따라 ‘인간 디자이너’와 컴퓨터의 파트너십이 형성됐다.
종이와 연필과 지우개의 자리를 스크린과 마우스와 팝업 메뉴가 차지했고, 컴퓨터 인터페이스는 디자이너의 두뇌와 손과 눈의 확장물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리기 중심의 디자인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새로운 조형 언어가 등장했다.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은 게리의 아날로그적 상상력에서 출발했지만, 컴퓨터와 디자인의 결합이라는 흐름의 교두보 구실을 했다.
○ 건축물로 국가 이미지 일신하려는 중국
구겐하임 빌바오의 충격이 컴퓨터를 통한 새로운 조형 언어의 추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명품 패션 브랜드들이 유명 건축가, 디자이너들과 손잡고 예술적 분위기가 감도는 독특한 디자인으로 매장 공간을 재창조했다. 매장과 갤러리와 극장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이다.
건축물이 특정 도시나 지역의 브랜드가 되는 ‘브랜드스케이핑(brandscaping)’으로 명명된 이 트렌드는 구겐하임 빌바오를 거치면서 더 진전되었다. 아르마니, 프라다, 루이뷔통 등 디자이너의 이름을 내건 패션 브랜드처럼 이제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힘입어 무한 복제될 수 있는 이 거대한 조각 오브제가 지구적 차원의 디자인 트렌드로 부상했다.
유럽 진출을 준비하던 구겐하임재단이나, 로스앤젤레스 뮤직홀을 세운 월트디즈니사, 흑인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를 기리기 위한 시애틀 익스피리언스 뮤직홀의 건립을 주도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부사장 폴 앨런,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 있는 매사추세츠 공대(MIT)의 미디어랩 등이 프랭크 게리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필요로 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트렌드를 극적으로 수용한 곳은 중국이었다. 중국은 2008년 올림픽 개최를 준비하면서 베이징의 ‘브랜드 이미지’를 변모시킬 도시 건축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노먼 포스터의 베이징 국제공항, 에르조그와 드 뫼롱의 올림픽 경기장, 렘 콜하스의 CCTV 사옥이 그것이다.
2008년에는 세계의 관광객들이 이 건축물들의 유혹에 못 이겨 올림픽 관람을 겸한 디자인 순례에 나서게 될 것으로 보인다. 게리의 작품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스페인의 공업도시, 빌바오를 방문하는 것처럼.
카이스트 산업디자인과 교수 kplee@kaist.ac.kr
:연재를 끝내며:
‘삶을 바꾼 디자인’이라는 주제로 네 가지 사례를 추려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관점에 따라 다른 견해가 개진될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인간의 삶과 상호작용하는 디자인의 다양한 측면을 살피려고 했다. 지면을 할애해준 동아일보, 자료 정리를 도와준 박해천 선생, 건조한 문장을 묵묵히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